성공의 비결이라 해야 하나요?

먼 옛날 고달팠던 지난날을 뒤로 하고,

현재의 위치에서 바라보는 삶의 자세라고 해야하나요?

아니면, 누군가를 의지하게 만든 만남의 중요성이라 해야 하나요?

 

비록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지만

제 삶을 모두 지켜 주고,

바르게 살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저에 대해 먼저 소개 하고자 합니다.

이름은 정상명(가명), 나이는 60세, 고향은 경남으로

3남 5녀 중 6번째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를 근근이 졸업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새로운 계모 밑에서 고진 학대를 이기지 못하고,

어린 여동생의 손을 잡고 무작정 집을 나왔습니다.

여동생을 위해 의식주를 해결해야 하는 환경 속에서

하루는 밥과 반찬을 구걸하고,

하루는 물로 허기를 채웠던 지난날의 고통스러운 날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네요.

 

이후 시간은 흘러 군 입대를 앞두게 되자

여동생이 걱정되어 끼니라도 거르지 않도록 하기위해

어느 가정집에 가정부로 맡겨 놓고 군 입대를 했습니다.

 

군 생활 중에도 여동생이 걱정된 저는 결국, 탈영을 하고 말았습니다.

탈영 때문에, 남한산성 육군교도소 복역 중 2년의 징역을 선고받고

홍성교도소에서 출소 했습니다.

 

징역을 받는 동안 여동생은 결혼을 했으나,

정작 저는 경제적으로 어려워 생활의 어려움 때문에 힘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릴 적 학대와 서러움이 한꺼번에 밀려와

술이 취한 상태에서 부모와 말다툼한 끝에

또다시 존속상해죄로 2년의 징역을 살게 되었습니다.

 

 

 

젊은 시절의 4년을 무의미하게 허송세월로 보냈던 시간은

제 자신을 잊게 만들었고, 자포자기에 빠진 채로 폐인이 됐습니다.

 

어느 날,

술기운이 가시고 정신이 돌아 왔을 때 저는 살인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지 않고 지나간 시간을

원망과 분노로 살아왔던 자신을 후회했을 땐 이미 늦었고,

강도살인죄로 징역 15년을 선고 받았습니다.

 

교도소 생활이 처음은 아니지만

장기 징역형을 선고 받고 생활하는 동안 자신을 깊이 되돌아보고,

모질게 자신을 학대했던 시간들을 반성하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대구교도소에서 김해교도소로,

다시 청주교도소에서 천안개방교도소로 그 긴 세월을 보낸 후,

과거의 제 이름은 영원히 교도소에 묻어두겠다는 마음을 안고

1995년 5월 가석방으로 출소하였습니다.

 

출소 후 오갈 데가 없이 홀로된 처지라

어쩔 수 없이 당시 대구갱생보호회를 찾아 갔습니다.

15년의 긴 세월을 6척 담장 안에서만 생활하다

처음 대하는 바깥세상은 모든 것이 낯설고, 힘들었습니다.

 

 

 

 

장기 수형생활로 인해 생활관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저를 위해

그 당시 최용탁 계장님께서(현 : 대구경북 지부장) 긴 시간동안 상담을 해 주셨습니다.

 

다음날 아침 5시부터 새로운 삶을 위해 지하철 현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몇 달 동안,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운전면허증을 취득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1종 대형운전 면허 취득 후,

대구경북 지부에서 버스회사에 취업을 알선해줬습니다.

 

1996년도 1월부터 버스운전기사로 취업되어 성실하게 근무하려 노력하던 중,

불행하게도 운행 중 접촉사고를 내어 3개월 치 월급(월 130만원) 전액을 변상하고

회사의 규정에 의해 퇴사를 하고 말았습니다.

 

  

 

정말 힘들고, 어려운 시기였지만, 그래도 좌절할 수는 없었습니다.

다행히 지하철 현장에서 저축해놓은 돈을 보태어

공단 지부에서 1톤 차를 한 대 구입해주었습니다.

 

화장지 장사를 시작 했습니다.

정직하게 열심히 노력 했습니다.

틈나는 대로 고물도 수집했습니다.

야간에는 택배회사에 출근하여 하역일도 했습니다.

똥차도 운전했었고, 화물차도 운전 했습니다.

정말 피 눈물 나도록 일했습니다.

 

은행 통장에 예금이 조금씩 불어날 때쯤 현재의 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한꺼번에 처와 아들 둘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게 정녕 꿈이 아니기를......!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이 비록 내 핏줄은 아니더라도

내 아들같이 열심히 잘 키워야겠다고 다짐 했습니다.

이것도 운명이리라 생각 했습니다.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의무를 다하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습니다.

 

 

 

 

가장으로서 책임감을 다하기 위해 고정적인 수입이 필요해

방역회사에 취업을 했던 것이 바탕이 되어,

2년간의 방역경험을 토대로 2000년 5월2일 방제

조그마한 구멍가게처럼 사업을 시작 했습니다.

 

처음에는 책상 1개와 전화기 한 대가 전부였습니다.

글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5년간 발이 부르트도록 뛰었습니다.

방역을 위해 한 아파트에 열두 번도 찾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아파트 입구에 주저앉아 운적도 수없이 많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에게도 그런 용기가 있었는지 웃음이 나네요.

 

지금은 큰아들 작은아들 전부 대학을 졸업시키고, 큰 놈은 결혼도 시켰습니다.

손자, 손녀도 있습니다.

 

회사는 그럭저럭 잘 운영되었고 직원은 6명이 됩니다.

그리고 얼마 되지는 않지만 자녀들에게 재산에 대해

소유욕을 절대 가지지 말라고 교육 시켰습니다.

대신, 60세가 된 지금에서야 나보다 못한 이웃을 위해 베풀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마음이 부자입니다. 10억대의 재산은 모두 사회에 환원할 것입니다.

나 자신의 장기도 모두 기증했고, 몸도 대학 병원에 기증 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 19년을 교도소에서 보내고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을 뒤돌아 볼 때

영화 “빠삐용”을 보는 것 같습니다.

 

공기의 고마움과 자유의 소중함을 알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항상 남에게 고마움과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겠습니다.

대구경북지부의 직원들에게 항상 고마움을 전합니다.

 

사진= 알트이미지

 

 

 

이 글은 2011 출소자 자립성공 및 지원 우수사례 수기공모에서

대상을 수상한 정상명(가명)씨의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교도소에서 복역한 사람들 중에 약 1/4은 3년 내에

또 다시 범죄를 저질러 재복역한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우리나라의 경우 연평균 수용자 수가 4만 8천여명에 달합니다. 이 중 1만 500여명(22.7%)이 3년 내에 재복역하는 인원입니다. 이 수치는 다른 나라에 비해서는 상당히 낮은 수치지만, 그래도 아직은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법무부는 수형자를 대상으로 한 ‘재범방지 사업’이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범죄예방 사업’보다 더 효과적이라 판단하고, 수형자들의 건강한 사회복귀를 위해 취업 알선·기술 교육 등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수형자들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결국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Posted by lawman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