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끝내 말하지 않았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3층 닫힌 창문을 통해 바라본 거리는 그림속 풍경화를 보는듯 생경하다. 번개치는 소리만이 비오는 거리와 내가 같은 세상에 있음을 알려준다.

 

자, 지금부터 울화통 터지는 한 사내의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잘 들어보시라. 선과 악이 뒤엉킨 요지경같은 세상 야그들을. 고귀하거나 인생의 가르침을 줄 만한 이야기는 많지 않을 것임을 미리 알려야겠다. 밑바닥까지 추락한 아귀다툼의 일그러진 군상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누구나 비슷한 경험을 했을 수도 있고, 한번 쯤 들어보았을 법한 흔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반면교사로서의 의미도 있고, 얍삭빠르게 살 수 있는 약간의 힌트도 있으니까 무익하지만은 않을 것이라 나름 핑계를 대본다.

 

우선 내 소개를 해야겠다. 나는 P경찰서 소속 경찰관으로 계급은 경장이다. 만년 경장으로 진급은 이미 포기한지 오래다. 키는 175센티미터, 몸무게 95킬로그램의 거구다. 그래서 좀 둔하기는 하다. 현장에서 다 잡은 놈들을 놓친 적도 있다. 물론 나만 아는 비밀이지만. 고등학교 졸업후 의경으로 군복무를 대신했고, 가산점을 준다기에 곧바로 순경시험을 쳐서 경찰에 들어온지 벌써 20년째다. 사람들은 나를 ‘박쥐이빨’ 또는 ‘박쥐형사’라 부른다. 예전에 도깨비파 조폭 수사할 때 조직원들 사이에서 나를 부르던 은어였는데 언제부터인가 동료들 사이에서도 내 이름보다는 이 별명으로 더 자주 불려지고 있다.

 

 

그림 출처 http://blog.naver.com/inhalo77/70107759419

 

박쥐는 날카로운 이빨을 숨기고 어두운 동굴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눈을 감고 촉각을 곤두세워 방심한 먹이감이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조용히 기다린다. 먹이감으로부터 반사하여 오는 공기의 진동을 귀로 감지하여 먹이감의 종류와 위치를 계속 체크하고 있다. 결정적인 순간 날아올라 단 한번 급소를 물어 절멸시킨다. 이건 내가 좋은 뜻으로 생각해본 것이고, 사실은 속내를 내비치지 않는 비사교적이고, 때로는 음험한 구석도 좀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내 성격을 풍자한 것일 게다. 그러니 숨겨진 이빨을 조심하라는 뜻도 있을 것이고.

 

“기왕이면 황금박쥐로 했으면 좀 좋아, 도깨비파 새끼들, 영 눈치가 없어, 그럼 내가 좀 살살했을텐데, 너희들은 시세말로 이제 완전 끝났어. 조직재건은 꿈도 꾸지마, 이 새끼들아” 그날도 나는 그 별명 때문에 승진이 되지 않는 것 같아 생각할 수록 열이 받았다. 얼마전 승진발표가 있었고, 동기들은 벌써 팀장은 기본이고 수사과장까지 단 놈도 있다. 커피를 마신 종이컵에 담배를 끄며 요즘따라 자꾸만 목에서 끓는 가래침을 ‘퇴’ 하고 뱉었다.

 

그 때 30대 초반의 남자가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온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조용히 자리를 권했다. 오늘 소환한 김규팔이라는 놈이다. 분명히 운전자를 바꿔치기 한 냄새가 나는데 뺀질거리면서 영 불질 않는다. 나는 컴퓨터를 켜고 조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문   이름이 무엇인가요.

답   김규팔입니다.

문   직업은 무엇인가요.

답   외제차 딜러입니다.

문   2011. 11. 20. 03:00경 운전을 하고 가다가 사고를 낸 적이 있나요.

답   네, 있습니다.

문   사고가 난 곳이 어디인가요.

답   서울 노원구 공릉동 태능 사거리입니다.

문   어떻게 사고가 났나요.

답   상계동에서 면목동 쪽으로 가다가 신호대기로 서있던 차량 뒷부분을 충격했습니다.

문   차량 정지 신호를 보지 못했나요.

답   노란불이어서 앞차가 서지 않고 가겠거니 하고 뒤따라 가다가 갑자기 서는 바람에 사고가 났습니다.

문   피해자는 차량정지신호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사고가 났다고 하던데요.

답   아닙니다. 피해자가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문   피해자는 전치 4주의 늑골골절 상해를 입었는데 인정하나요.

답   네, 인정합니다.

문   당시 음주상태였지요. 혈중알콜농도가 0.15% 정도 되었구요.

답   네, 맞습니다.   

문   그 시간에 어디 가던 중이었나요.

답   고객이 사고가 났다고 처리해달라고 연락이 와서 청담동 쪽으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문   동승자가 있었나요.

답   없었습니다.

문   피해자는 분명히 2명이 타고 있었다고 하던데요

답   아닙니다. 저 혼자 타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조수석 문에서 내렸다고 하던데요

답   아닙니다. 피해 운전자가 잘못 보았을 겁니다.

   문능화씨를 아는가요.

답   그냥 고객중 한사람입니다.

문   그날 문능화씨를 만났나요.

답   아니, 만나지 않았습니다.

   차량은 문능화씨 소유이던데 어떻게 된 것인가요.

답   문능화씨한테 빌려 타고 있었습니다.

문   차량을 빌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당신 소유 차량이 있었데요

답   네, 제 차량은 고장이 나서 운행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문   고장이라..., 고장난 데가 없었데요.

답   고장난 게 맞습니다. 아내도 제 차를 이용하니까 아내가 고쳐놓았나보죠

문   당신 아내는 차량을 수리한 적이 없다고 하던데요.

답   아무튼 저는 빌려서 운행하고 있었습니다.

문   통화내역에는 상계동 노원역 부근에서 문능화씨와 통화한 기록이 나오던데요. 문능화씨도 그 때 그 근처에 있었고요.

답   우연히 같은 장소에 있었겠지요. 통화는 수시로 하니까요.

문   그리고 문능화씨 통화내역에는 태능 사거리 부근에서 통화한 기록이 나오던걸요

답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이 때 미리 대기하고 있던 문능화를 불러 물어본다) 문능화는 40대 초반의 여자로서 이혼하고 혼자 살고 있었다. 전남편으로부터 10억원의 위자료를 받아 그 돈으로 중고명품점을 운영하면서 경제적으로 꽤 풍족한 것 같았다. 김규팔과는 외제차를 구입하면서부터 알게 되었고, 상당히 친밀한 관계인 것 같았다. 직감적으로 내연관계인 것이 분명했다.

문   태능 사거리 부근에는 왜 있었나요.

답   친구를 만나고 있었습니다.

문   친구 누구를 말하나요.

답   사생활인데 그런 것까지 말해야 되나요.

문   그런가요. 그럼 당시 어디에 전화했나요.

답   집에 있는 애한테 곧 들어간다고 전화했을 겁니다.

   집에 통화한 내역은 없고, 112에 통화한 내역이 있던대요

답   잘못 눌렀나보죠, 뭐

문   교통사고가 났으니 출동해달라는 내용이던데요.

답   아니 그런 것까지 어떻게, 경찰에서 도청까지 하나요.

문   규정상 112 상황실에 전화한 내용은 모두 녹음되어 있고, 일지에 기록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김규팔과 함께 있었던 것이지요.

답   (아무 말이 없다).

문   좋습니다. 그럼 김규팔에게 차량은 왜 빌려주었나요.

답   김규팔씨는 영업상 차량이 없으면 안되는데,,,,며칠만 빌려달라고 해서요. 저는 별로 타고다닐 일이 없었고요....

문   그렇군요. 집은 어디시죠.

답   구리시입니다.

문   최근에 병원에 간 적이 있었나요.

답   없습니다.

문   자주 다니는 병원이 있나요.

답   없습니다.

문   국민건강보험에 문의해보니 사고 당일 구리시에 있는 정형외과에 갔더군요

답   아! 그건, 갑자기 가슴이 답답하고 목이 아파서요.

문   경추압박골절이던데요. 운전대에 눌린 자국이 아닙니까.

답   아닙니다.

문   그리고 사고 당시의 운전석의 높이나 넓이가 당신 키 정도에 맞춰져 있던데요

답   아닙니다. 저는 당시 절대 운전하지 않았습니다.

문   당시 카드 사용내역을 보니까 사고 직전 상계동 참피온 모텔과 킹콩 바에서 결제한 내역이 있더군요.

답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그게 운전한 거랑 무슨 상관입니까. 아무리 경찰이라도 사생활을 이렇게 까발려도 되나요.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겁니다.

문  고소는 하셔도 되는데...본건은 사고 당시 누가 운전했는지가 쟁점이니까 그 전후의 행적도 당연히 조사해야죠. 물론 순순히 진실을 말했으면 거기까지는 조사하지 않았겠지요.

답   (얼굴이 불거지며 독기를 품은 눈으로 조사관을 빤히 쳐다보기만 한다.)

문   킹콩 바에서는 양주 1병을 마셨더군요. 김규팔씨와 함께.

답   아닙니다. 김규팔씨랑은 마시지 않았습니다.

문   당시 손님이 거의 없어서 바 종업원들이 김규팔씨와 당신의 인상착의를 정확히 기억하던데요.

답   아무튼 저는 운전하지 않았습니다.

문   정리하면 이렇군요. 참피온 모텔에서 김규팔과 함께 투숙한 다음 나와 킹콩 바에서 양주 한병을 나누어 마셨다. 새벽시간이라 음주단속이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당신이 운전을 했고, 김규팔을 묵동 그의 집앞까지 내려주려고 김규팔이 조수석에 동승했다. 당신이 사고를 냈고, 당황한 나머지 김규팔에게 사고수습을 부탁했다. 김규팔이 조수석 문을 열고 피해 차량으로 간 사이 112에 전화를 하고, 그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그날 교통사고로 목이 아퍼 병원에 간 것이다. 어떻습니까. 아닌가요.

아닙니다.

(이런 연병할 연놈들이 있나. 이만하면 순순히 자백할 때도 됐는데, 독종들이다. 목구멍에서 훅하고 치민다. 한대 쥐억박고 싶었지만 꾹꾹 참는다)

문   (김규팔에게) 문능화씨 말이 모두 사실인가요, 달리 반박할 말은 없나요.

답   네, 모두 사실입니다. 반박할 말도 없습니다.  

문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이만 마치겠습다.

답   (김규팔, 문능화 모두) 더 할말은 없습니다.

 

문능화는 이미 술이 깬 상태에서 경찰에 출두했고,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도 특정할 수 없어 음주운전 책임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도주차량 그러니까 뺑소니에다 범인도피교사죄로, 김규팔은 범인도피죄로 구속되었다. 김규팔의 처는 김규팔과 문능화의 불륜 사실을 알고 이혼소송을 제기했고, 문능화를 상대로도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만약 사고 당시 진실을 밝혔더라면 문능화만 음주 교통사고에 해당되어 합의할 경우 벌금형으로도 처벌이 가능했고, 둘 사이의 은밀한 관계도 좀 더 유지되지 않았을까. 가정의 평화도 유지하면서. 그렇지만 어느 쪽이 더 나은 선택이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김규팔의 처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남편의 비밀을 알게 된 계기가 되었으니까. 그것도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았을 수도 있고. 세상은 뿌린대로 굴러가게 놔두는 수 밖에. 그래서 모든 사후의 평가는 무의미하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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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awm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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