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가을, 바람부는 어느날

 

1. 제법 매서운 바람이 사무실 작은 창문을 흔들고 있다. 창살 너머 거리 위엔 떨어진 나뭇잎들이 힘겹게 나뒹굴고, 잔뜩 풀죽은 듯한 청년들 몇 명이 어깨를 움추린채 종종걸음으로 어디론가 몰려가고 있다. 어느덧 겨울 풍경으로 사방이 물들기 시작하는 11월 어느 하오. Y경찰서 K 경사는 사무실 의자에 앉아 감길 듯 나른한 눈빛으로 사무실 한켠으로 쏟아지는 햇살을 바라보며 지난밤 꾸었던 악몽을 떠올리고 있었다. 한 번도 오르지 못한 히말라야 설산 깊은 계곡을 가파르게 호흡하며 걷다가 그만 길을 잃었다. 멀리 산등성이로 저녁 노을이 비껴가고 죽음의 그림자와 함께 어두움이 밀물처럼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한뼘이라도 좋으니 하루밤 눈보라와 추위를 막아줄 보금자리를 찾아야 했다. 발길 닿는대로 바위와 눈길을 헤치며 정신없이 헤매다 깊디 깊은 구렁으로 빠져 곤두박질쳤다. 곧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아련함과 서늘한 아픔이 느껴졌다. 지상에서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며 죽음 저편을 향해 자꾸만 내려가다가 식은 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벌써 며칠째 똑같은 꿈이다.

 

2. 악몽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채 다시 한 번 묘한 환상속에서 허우적거리다 누군가 책상 위에 기록 뭉치를 던져두고 가는 소리에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무심코 기록 맨 첫장에 눈길을 주었을 때 “변사사건 발생보고, 변사자 김00(여,30세), 자신의 아파트 베란다 빨래걸이 줄에 목을 메 죽어 있는 것을 남편 이00이 발견, 목에 삭흔 외 다른 외상 없고 유서가 있는 점에 비추어 타살 가능성 없어 사체는 유족에게 인도하고자 합니다”라는 글귀가 보였다. 늘 보아오던 변사사건 발생보고서의 전형적인 내용이다. 그러한 죽음을 너무도 많이 보아 와서 이젠 아무런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그런데 변사자의 이름이 낯설지 않다. 이상한 느낌에 서둘러 다른 페이지를 빠르게 넘겨보았다. 맨 뒤쪽에 변사자가 정성들여 써내려간 유서가 편철되어 있었다. “당신과 만나 백년가약을 맺은지 벌써 3년이 지났군요, 서로 믿고 평생을 뜨겁게 사랑하며 한날 한시에 같이 죽자고 애끼 손가락 걸고 다짐했었지요. 참 지금 생각하니 어쩌면 그리도 유치했는지 피식 웃음이 나오네요. 그렇지만 그때는 어린 아이들처럼 마냥 즐거웠지요. 우리의 딸 아이가 태어나 예쁘게 자라는 모습을 함께 지켜보면서 당신도 나도 너무 너무 행복하지 않았나요. 적어도 저는 그랳거든요. 당신은 아니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더욱 슬퍼요. 그래요 당신이 이미 결혼한 전력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을 때에도 얼마간은 배신감에 죽고싶은 심정이었지만 당신의 맹세가 있었기에 용서할 수 있었답니다. 그런데 당신은 언제부터인가 나와 우리 가정에 소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많이도 싸웠지요. 결국 당신이 집을 나갔지만 저는 당신이 언젠가 돌아오리라 믿었습니다. 처음 저와의 맹세를 잊지 않았다면 말이에요. 당신이 또 다른 누군가와 나에게 했던 약속을 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도, 그 사람과 함께 있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도 결코 절망하지는 않았습니다. 다시 돌아오지 않더라도 나에게만은 진실을 말할 줄 알았어요. 한 때는 내 인생에 가장 눈부신 날들을 함께 했던 사람이라면 그 정도 배려는 해주었어야 하지 않나요. 그러면 이렇게까지 비참하지는 않았을텐데.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제발 저를 놓아달라고 무릎 굻고 간청했지만 당신은 그것마저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이제 제가 택할 수 있는 것은 하나 뿐이 없습니다. 당신이나 세상 사람들은 저를 욕할지도 모르겠어요. 누구에게나 실수는 있기 마련인데 뭐 그런 걸 가지고 이 난리를 부리느냐고요. 하지만 당신의 실수는 용서할 수 있지만 죽어서도 당신만은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부디 우리 딸 아이만은 잘 키워주세요” 유서의 내용을 보자 머리카락 한올 한올이 하늘로 치솟으며, 몇 달전에 있었던 일들이 떠오른다.

 

3. 그녀는 경찰서로 찾아와 “지금 남편이 어떤 여자와 만나 호텔에 들어가는 것을 목격했어요, 이혼소장은 이미 접수했구요, 빨리 저와 같이 가주세요”라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이크 또 골치아프겠군’이라고 생각하며 그녀와 함께 그녀의 남편이 어떤 여자와 투숙했다는 00호텔 어느 방으로 갔지만 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10여분 지체하는 동안 남편은 이미 창문을 통해 달아났고, 묘령의 여자만이 옷을 모두 입은채 침대 위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마치 은밀한 사생활에 끼어들어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와 나는 아무 일도 없었어요, 너무 오버하는거 아니에요”라는 한마디를 내뱉으며. 어쨓든 호텔 방실을 이곳저곳 뒤져보았지만 단서가 될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일단 묘령의 여자를 연행했고 뒤늦게 그녀의 남편도 자진 출석하였지만 완강히 자신들의 순수성을 강변하고 증거가 없어 모두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 사정 이야기를 했고, 그녀도 이해하는 듯하여 그렇게 사건은 마무리되는 것으로 알았다. 그 다음날 그녀는 다시 현장에 가서 확보한 것이라고 하면서 구겨진 휴지조각을 제출하였다. 육안으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경험에 비추어 다른 투숙객의 것으로 보인다. 이잡듯 샅샅이 뒤진 것은 아니었지만 증거가 발견될만한 몇 몇 곳에서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던가. 이런 일에선 으례 그렇듯 그녀는 너무 집착한 나머지 이성을 잃고 있는 것이다. 막무가내로 한번 검사해보아 달라고 하여 마지못해 남편과 묘령의 여자에게 혈액채취를 요구하였지만 거부하였다.

 

4. 이런 저런 다른 사건 더미속에 빠져들었고, 그녀는 나의 뇌리에서 점점 사라져갔다. 몇 달을 끌다가 더 이상 수사를 진행할 가치가 없다는 의견으로 검사에게 지휘의견을 내놓은 상태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L 검사는 유전자 감식을 해보란다. 어이가 없다. 용의자들이 혈액채취에 부동의하고 있으니 압수수색영장을 받아서라도 말이다. 이러니 수사지휘가 없어져야 보다 중요한 사건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현재로선 지휘를 거부할 수 없으니 지휘내용대로 압수수색영장을 청구하고 용의자들의 혈액을 강제 채취하여 국과수에 유전자감식을 의뢰해놓았다. 그 결과가 오늘 나온다고 했는데 그녀의 죽음이 먼저 찾아온 것이다. 부랴부랴 국과수에 연락해보았다. 휴지조각에선 정액이 검출되었고, 남편과 묘령의 여자의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남아있었으며 그 흔적은 두 사람의 유전자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사무실을 나섰다. 한바탕 서늘한 바람이 온몸을 휘감고 지나간다. 사무실 앞에 ‘수사구조 개혁, 민주사회의 시대적 요구‘라는 플랭카드가 보인다. 그 위로 그녀가 처음 경찰서 문을 들어섰을 때의 활기찬 모습이 겹쳐 지나간다. 나의 안일함으로 또는 애써 외면하고픈 그 무엇으로 인해 볼 수 없었고 보지 않았던 것을 드러내 진실을 끌어내고 억눌린 영혼을 위무해줄 수 있는 그 무언가는 반드시 필요할 것 같다. 나에게는 일상이 되어버린 이 업무를 조금 먼 곳에서 들여다보고, 그리하여 썩은 연못에 고여 있지 않고 정의의 강물 위를 흐를 수 있게 해줄 수 있는 조타수 말이다. 그것이 아무리 힘겹고 귀찮더라도. 오늘 밤은 악몽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을런지...

 

※후기: 그 후 그녀의 남편과 묘령의 여자는 구속되어 현재 구치소에 수감중이다. 그들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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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awm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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