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르뽀, 검사실의 하루

 청 근처 24평형 아파트를 관사로 배정받았다. 적어도 2년간은 생존을 위한 싸움에서 해방되어 의미있는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로 설레었다. 정처없이 떠돌다 국가와 국민의 도움으로 처음 정착한 것이다. 이런 호사를 누리다니 꿈만 갔다. 물론 그 호사는 특권이 아니라 막중한 책임이 전제되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잠자리가 편하지만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갚아야할 빚을 한가득 지고 있는 기분이랄까. 그렇더라도 낯선 곳에서의 하루하루는 음유시인이 불쑥 이국의 땅에 던져져 보고 듣는 모든 것이 시가 되고 음악이 되는 것처럼 새로웠다.

 J시는 인구 20여만의 중소 규모 도시로, 곳곳에 비경을 간직한 명산들이 많았다. 모두들 대도시에서 화려한 검사생활을 꿈꿀 때 아무도 지원하지 않는 이런 외진 곳을 택한 것도 일정부분은 그 산들 때문이었다. 산과 산들 사이로는 강이 흐르고 우리나라 산업 발흥기인 60-70년대 에너지 확보와 홍수조절을 위해 건설된 댐이 여러개 있었다.

북한의 금강산 부근에서 발원한 강은 각지에서 흘러든 여러 지천을 합친 후 휴전선에서부터 국가하천 구간이 시작되고, 지천이 합쳐지는 곳곳에 호수가 만들어졌다. 댐이 설치되면서 인공 호수도 여럿 생겨났다. 이렇듯 J시는 물이 많아 예로부터 물자 집산지 역할을 하였고, 그곳 나루터는 서울에서 소금배가 올라오거나 특산물을 싣고 내려가기도 하고 뗏목 운행도 성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댐들이 들어서면서 나루터와 뱃길은 모두 사라졌다고 하고, 이제는 굽이굽이 호수나 강을 끼고 있는 도로들이 마이카족들이나 오토바이족들의 드라이브코스로 각광받고 있었다.

그렇게 J시는 산과 강의 도시다. 검은 어둠의 장막을 뚫고 희미한 빛줄기가 사방으로 서서히 퍼져나가는 이른 새벽녘이면 댐에 갇힌 물 위에서 물안개가 연기처럼 피어오른다. 그 풍광은 때때로 태초의 신비를 보는듯 경이롭다. 도시 전체가 물안개에 휩쌓여 숨죽인채 잠겨 있다가 태양의 출몰과 함께 그 모습을 드러낸다. J시 사람들은 순결한 산하를 닮은 듯 너그러웠고, 외지인인 나에게도 더없이 친절하였다.

 

                                    사진출처 http://blog.naver.com/acanso12?Redirect=Log&logNo=50103335740

 

나는 형사부에 소속되어 아침 8시 전에 출근하여 밤늦게까지 눈코뜰새 없이 빠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아직 업무처리가 서툴기도 하려니와 핑계같지만 검사 1인당 할당된 절대적인 일의 양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는 일이라야 경찰에서 송치한 사건 검토, 관련자들 조사, 수사지휘, 각종 영장처리 등 주변에서 다반사로 일어나는 형사사건을 처리하는 것이 거의 전부이다.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그래서 검사의 이름을 빛나게 하는 사건들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기록 하나하나에 한사람 한사람의 인생유전이 담겨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아무리 작은 사건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검사의 잘못된 결정이 누군가에게는 씻을 수 없는 고통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간담이 서늘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저 단순한 업무의 실수라고 넘어가기에는 그 피해가 너무도 크다. 시간을 거꾸로 갈 수 없는 것처럼 원점으로 되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물론 검사도 완벽할 수만은 없는 인간일 뿐이고, 어쩔 수 없이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 그 또한 거기에 관여된 사람들의 운명이고 세상살이가 다 그런 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가능한 한 무오류인 신의 영역에 가까워지려고 노력은 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신들만 산다는 8,000미터급 이상의 산에 도전하듯이 말이다.

혐의 유무, 혐의가 인정된다면 적정한 처분은 무엇인지, 신병을 가두어 자유를 억압하고, 사생활을 뒤지기 위해 압수수색하는 것이 꼭 그렇게까지 해야만 하는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검사도 수많은 직업들중 하나이고, 주어진 업무를 기계적으로 처리할 뿐이며, 밖으로 드러난 결과만을 보고 그저 육법전서속 무채색의 조항들을 끌어다 적용하기만 한다면 일은 의외로 단순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내가 이 일을 하는 동안에는 법률가로서가 아니라 소시민의 한사람으로서 분쟁의 중심에 놓인 당사자의 입장이 되어도 보고 그 반대편의 입장이 되어도 보면서 최대한 중립의 위치에서 진실을 알아내려 노력하고자 했다. 학문적으로 검사의 지위가 어떠하다던지 어떤 소양을 갖추어야 한다느니 따위에 대해서는 그동안 수많은 장광설들이 있기에 여기서는 접어두고자 한다. 근엄함과 권위를 배제한 인간의 얼굴을 한 검사, 높은 위치에서 단죄하는 사람이 아닌 친구로서, 이웃으로서 언제나 그들과 함께 가난하고자 했던 검사를 말하고자 할 따름이다. 그 가난은 물질적인 가난일 수도 있겠지만 그 보다는 힘, 권력, 공명(功名) 따위를 가지지 못하였다는 의미에서의 가난이다.

그렇다고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동정이나 연민의 정에 쉽쓸려 쓸데없는 예단을 갖거나 그로인해 실체를 왜곡하거나 해서는 안되겠기에 어느 정도는 냉철한 이성 또한 전제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고뇌하는 시간이 많아질 수 밖에 없었다.

수사는 사람들에 대한 조사가 주가 될 수 밖에 없고, 각자의 말 속에서 진실을 찾아가며 거기에 객관적인 증거들이 더해져 사실관계가 규명된다. 궁극적으로는 과연 어떤 처벌을 할 것인가의 문제만 남는다. 법전이 있고, 양형규정이 있기는 하나 현실의 다양한 현상들을 접하다 보면 거기에만 의존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이 검사의 재량이라고들 하지만 재량의 범위에서 합당한 접점을 찾는 것은 개별 검사들의 몫이고, 그 접점을 찾는 방법 또한 각자의 선택일 수 밖에 없다. 검사 개개인의 인생에서 얻은 경험, 지혜일 수도 있고, 당사자를 직접 접하고 얻는 나름의 사람보는 눈일 수도 있으며, 주변의 평판이나 의견 따위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나는 원하던 원하지 않던 매일 사람들을 만난다. 사람들을 소환하면 그네들은 대부분 겁부터 먹게 된다.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지’, ‘내가 고소한 사람이 법망을 빠져나가면 어쩌지’, ‘괜히 검사한테 밉보이면 어떻하지’ 등등 만감이 교차한다는 것을 그들의 말투에서 알 수 있다. 그런 막연한 공포심을 덜어주려고 상세한 설명을 하여도 마지막 의구심까지 떨어내어 줄 수는 없었다. 나또한 신호위반 딱지라도 받게 되면 두려움이 먼저 찾아오는 것을 보면 그것은 인지상정인가보다. 세무서, 수사기관, 병원에는 가급적 가지 않는 것이 좋다는 속설도 그래서 생겨나지 않았나 싶다. 사회적, 육체적 환부를 도려내는 것을 업무의 특성으로 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도려내는 것은 일단 아프니까. 그러나 기록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보는 것은 불가피하다. 활자를 통해 상상했던 것과 같은 모습의 사람도 있고, 정반대의 사람도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눅이 들어 있는 사람, 무조건 큰 소리치는 사람, 터무니 없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 사람, 눈물을 흘리며 읍소하는 사람 등등 그 모습은 천태만상이다. 죄의 유무를 떠나 그 사람의 성향이 크게 좌우하는 것 같다. 나는 가급적 말수를 적게 하면서 많이 들으려고 하였으나 때때로는 평상심을 잃고 윽박지르기고 하고, 분노를 참지 못하고 훈계하기도 한다. 법의 이름이 아니라 개인적인 자격으로 그렇게 해도 되는 것인지 반성하지만 젊은 혈기를 주체할 수 없는 평범한 한사람으로서의 감정까지 자제하기는 어려웠음을 고백한다.

행세께나 한다는 사람들은 여기저기 요로를 통해서 또 얼마나 많은 청탁을 하려드는가. 처음에는 그런 사람들을 불러 그가 뒷전에서 했던 짓들을 적나라하게 까발리며 엄중히 경고하기도 했으나 그 또한 올바른 방법이 아님을 깨달았다. 오죽 억울하면, 본인으로서는 얼마나 다급했으면 그렇게라도 해야 했을지 이해도 간다. A라는 사람이 칼자루를 쥐고 있고, 내가 아는 B라는 사람이 A라는 사람을 잘 알고 있다고 하는데 부탁하고 싶은 유혹을 받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문제의 근원을 찾는다면 첫 번째로 그런 식의 방법이 종종 목적을 달성하는데 유용한 수단으로 통해왔다는 것이고, 둘째로 기관과 일반인들(또는 다른 기관) 사이에 가로막힌 소통의 벽이다.

짧은 소견이지만 어쩌면 두 번째가 더 중요할지 모르겠다. 기관도 가급적 많은 정보를 낱낱이 공개하고, 누구든 쉽게 찾아와 말할 수 있다면 첫 번째의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을 것도 같다. 각 공공기관에서 형식적으로는 경쟁적으로 문턱을 낮추는 제도를 이것저것 만들고 있으나 특히 법조기관의 경우 실질에 있어서는 아직까지도 갇힌 조직, 은밀한 조직으로 인식되고 있는 이유에 대해 곱씹어보아야 하지 않을는지.

제목과 달리 서두가 너무 길었다. 아무튼 위에서 언급한 여러가지 이유들로 인해 검사실은 매일 복마전이었다. 몇가지 대화 장면들을 통해 검사실의 하루를 잠깐 들여다보자.

[장면 1]

문: 어떤 일을 하시지요.

답: 고래섬에서 유원지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문: 고래섬이라면 댐건설로 강위에 생겨난 그 섬 말입니까.

답: 네, 그렇습니다. 위쪽으로 댐이 생기면서 주변이 물에 잠겨 섬이 되었습니다.

문: 그 섬전체가 선생님 소유인가요.

답: 엄밀히 말하면 주식회사 고래섬의 소유이고 저는 그 회사의 대표이사입니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인데 제가 사업을 위해 주식회사 고래섬이라는 법인을 만들어 소유권을 법인 앞으로 넘겼습니다.

문: 저희들이 썩은 물이 흐른다는 민원을 접하고, 추적해 보았습니다. 그 근원지는 말씀하신 고래섬이었고, 직접 가서 포크레인으로 땅을 파헤쳐보니 쓰레기 더미가 끝없이 나오던데 누가 한 짓입니까. 고래섬이 아니라 쓰레기 섬이라고 불러야 할 지경이던데요. 아무 시설없이 족히 수십년간 쓰레기를 마구 매립했던 것 같더군요.

답: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누가 한 짓인지 모릅니다. 정말입니다.

문: 직원들 말에 의하면 대표이사님이 지시했다고 하던데요. 정상적으로 섬밖으로 폐기물을 내어가 처리할 경우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그렇게 했다는데. 그럼 직원들이 거짓말하는 것입니까.

답: 그 직원이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저희 회사에 원한이 있는 사람 같습니다.

문: 회사와 원한 살만한 직원들이 많은가요.

답: 사실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직원들을 해고하다 보니 개중에는 회사에 불만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들중 누군가가 저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고 있는 것입니다.

문: 그래요? 대표이사가 회사에서 수십년간 이루어지고 있는 일을 모른다는게 말이 됩니까.

답: 직원들이 귀찮으니까 밤에 몰래 매립하면 전들 어떻게 알겠습니까.

문: 그럼 그 업무를 담당하는 직원이 누굽니까. 그 사람을 구속해야 하겠군요.

답: 김말동이라고 합니다. 저희 회사 상무로서 수십년간 저와 함께 일했습니다. 제딴에는 회사를 위한다고 그런 짓을 한 것 같습니다.

문: 설사 대표께서는 몰랐고 그 직원이 그러했다 하더라도 회사의 총책임자로서 책임지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 정상인데 전혀 그런 기색이 없고 빠져나가려고만 하는군요.

답: 빠져나가려는 것이 아니라.....저는 진실만을 말했을 뿐인데...(목소리가 커지며) 왜 제 말은 믿어주지 않으십니까. 이거 너무 하시는 거 아닌가요...

문: 그렇군요. 진실만을 말하신다? 죄송해서 어쩌지요....(이 때 사진을 보여주며) 그런데 이 사진은 뭔가요.

(사진엔 대표이사가 쓰레기 매립 현장에서 진두지휘하는 모습이 들어있다)

답: (깜짝 놀라며) 아니 이거 누가 찍은 거야. 내 참.

문: 회사 홍보자료를 검토해보니 의문의 사진이 있었습니다. 흐릿하게 처리된 부분이 있는 것 같아 사진관을 추적했습니다. 마침 필름을 보관하고 있기에 원래의 사진을 복원해 보았더니 홍보자료에 실린 사진은 쓰레기 매립장면은 삭제했던 것이더군요.

답: (갑자기 고개를 떨군채 말이 없다.) (그러더니 의자에서 내려가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검사님 잘못했습니다.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문: 아니 이러시면 안됩니다. 일어나시지요. 저한테 용서를 빌건 없습니다. 쓰레기가 땅속에서 썩어 침출수가 나와 인근 하천을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모든 시민들이 마시는 식수원이기도 하구요. 앞으로 말끔히 치우고 망가진 땅을 회복하도록 최선을 다하시면 됩니다. 물론 저지른 죄에 대해서는 합당한 처벌을 받으시면 되고요.

답: 네,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돈을 조금 아끼려다가 이런 큰 죄를 저질렀으니....빠른 시일내에 매립한 쓰레기를 모두 파내겠습니다.

그는 그 후 1년간의 옥살이를 했고, 지금은 누구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환경전도사가 되어 있다. 고래섬은 생태공원으로 변모하여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사진 출처 http://blog.naver.com/davinci0101?Redirect=Log&logNo=150022353009

(사진은 본문 내용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장면 2]

문: 당신은 진술거부권이 있습니다. 불리하다고 생각되시면 진술하지 않아도 됩니다. 변호인의 조력을 받으면서 조사받으실 수도 있고요. 조사도중 몸이 불편하거나 물이 마시고 싶으시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답: 네, 알겠습니다.

문: 이름은 무엇입니까.

답: 양이남입니다.

문: 직업은 무엇이지요.

답: 심부름센터 직원입니다.

문: 당신이 운전하던 봉고차 트렁크에서 토막난 시체가 든 가방이 발견되었는데 사실인가요.

답: 네, 그렇습니다.

문: 시체의 신원에 대해 아는가요.

답: 모릅니다. 저는 그저 심부름만 했을 뿐입니다.

(시체는 사지가 절단되었고, 머리와 양팔, 양다리는 없는 상태였다. 그러니까 몸통만 있는 시체였던 것이다. 그래서 신원은 알 수 없었다)

문: 누구 심부름입니까.

답: 모릅니다. 저는 전화연락을 받고 어디어디에 가면 가방이 놓여 있으니 그것을 싣고 산속이나 강에 버리라는 부탁만 받았을 뿐입니다.

문: 그 전화번호는 몇번인가요. 

답: 전화번호도 알 수 없습니다. 저는 발신자 표시가 제한된 전화를 받았으니까요. 또 알 필요도 없구요. 저희는 시키는 대로 일만 해주고 돈만 받으면 되니까요.

문: 수수료는 얼마를 어떻게 받았나요. 

답: 아직 받지 못했습니다. 일이 끝나면 준다고 해서요.

문: 의뢰인이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수수료를 받을 생각이었나요. 

답: 처자식은 먹여살려야 되겠기에 선불로 안준다고 모처럼 찾아온 일거리를 거절할 수도 없었습니다. 의뢰인을 믿어야지 어떻하겠습니까.  

문: 그렇다면 가방에 시체가 들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나요.

답: 그것도 몰랐습니다. 저희는 고객이 맡긴 물건에 손을 대지 않는 것이 업무수칙입니다.

문: 의뢰인이 신분을 숨겼고, 가방을 버리라고 한 것으로 보아 범죄에 연루되었을 가능성 정도는 충분히 예상했을 것 같은데요.

답: 그렇게도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고객이 자신의 신분을 감추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고, 가방을 버리라고 해서 꼭 범죄와 관련있다고 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문: 그건 맞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J시에 들어왔다는 때를 기점으로 상당 기간 전까지 J시로 연결된 국도에서 운행한 차들을 모든 방범용 CCTV를 통해 확인해 보았어요. (이 때 도로지도와 CCTV 캡쳐화면을 보여주며) 여기 A지점에서는 당신이 운전하고 누군가가 옆자리에 함께 타고 있었어요. 그런데 B지점에 이르러서는 당신 혼자 운전하고 있지요. 그 사이 동승했던 사람은 내렸다고 보여집니다. A지점에서 B 지점까지는 3킬로미터 정도 되고 그곳은 양옆으로 강과 야산만 있습니다. 인적이 드문 곳이지요. 동승했던 사람이 그곳에서 내릴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시체의 머리와 팔다리를 따로 버리려고 내린 것 아닌가요. 그리고 당신은 몸통을 다른 곳에 버리고 되돌아가면서 동승자를 다시 태우고 가려 했던 것이고. 그렇지 않습니까.

답: (순간 눈빛을 피하며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쳐간다) 아닙니다. 검사님, 추리소설을 너무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경찰이 실적을 올리기 위해 CCTV 화면을 조작했을 수도 있고, 검사님 말씀이 사실이라고 해도 제가 사람을 죽였다는 증거는 아니지 않습니까.

문: 네, 물론 저도 추리소설 좋아합니다. 자, 그럼 다른 증거들을 볼까요. 당신과 함께 당신 집을 현장검증했지 않소. 1차 현장 감식에서는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지요. 당신은 한시름 놓았겠지. 그런데 욕실과 세탁기가 있는 다용도실에서 염산으로 깨끗이 청소한 흔적이 남아있더군요. 한밤중에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는 위층 주민의 증언도 있었구요. 그래서 그곳만 더욱 정밀한 방법으로 2차 감식을 했지요. 물론 당신도 그 때 참석했고. 그런데 말이에요. 2차 감식에서는 욕실 샤워용 칸막이 커튼에서 채 한방울도 안되는 미세한 혈흔이 발견되었고, 세탁기 뚜껑 틈새에서도 혈흔이 발견되었어요. DNA 분석을 해보니 죽은 시체의 DNA와 동일해요. 죽은 자가 당신의 욕실에 왜 있었겠나.

답: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1차 감식 때 안나온 혈흔이 2차 감식 때 왜 나옵니까. 제가 없는 사이에 누군가 집에 들어가서 시체의 혈흔을 남겼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문: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1차 감식 때부터 2차 감식 때까지 당신 아파트 현관에 설치된 CCTV 녹음테이프가 보관되어 있으니 누가 들어갔는지는 금방 알 수 있을 겁니다. 시체의 절단면을 보면 깨끗하지가 않아요. 경험이 많지 않은 사람이 서투르게 한 짓으로 보이지요. 톱으로 자른 것 같은데 한번에 잘 잘라지지 않으니까 여러 군데를 마구 절단한 흔적이 있어요. 무척 조급했거나 톱이 잘 들지 않았을 수도 있고. 뼈를 부순 흔적도 있는 것으로 보아 잘 잘리지 않으니까 망치같은 것으로 내려친 것도 같고요. 흔적을 지우려고 염산으로 청소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완벽하진 못했어요. 그리고 당신 집 공구함에 다른 것은 다 있는데 톱과 망치만 없어요. 분명히 공구함에는 톱과 망치가 들어가는 자리가 있는데 말이죠.

답: 그것도 억측이십니다.

문: 시체가 들어 있던 가방은 당신 가방이 아니라고 했지요?

답: 네, 그렇습니다.

문: 그런데 당신 집을 압수수색하니까 같은 상표의 다른 종류의 가방이 있었어요. 그 가방은 명품 같은데 사실은 짝퉁이었었습니다. 그 분야의 사람들끼리는 누가 만들었는지 금방 알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조자를 수소문해보았지요. 그 사람은 고객을 관리하기 위해 전화번호를 모두 적어놓았더군요. 구매한 날짜와 물품도 기재되어 있고. 당신은 이전부터 그 사람과 여러차례 거래를 했고, 최근 큰 가방을 준비해달라고 했다하더군요. 시체가 든 가방을 보여주었더니 당신이 사간 것과 같은 제품이라고 하더군요.

답: 아닙니다. 짝퉁업자가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요...

문: 그럴 수도 있지요. 다른 사람이 당신 전화를 사용했을 수도 있고. 그럼 또 다른 증거를 보여드리지요. (현금이 들어 있는 박스를 보여주며) 당신이 깊숙이 감춰둔다고는 했지만 보일러실 안쪽에서 현금다발이 발견되었어요. 1억원. 그것도 모두 현금으로. 그 큰 돈이 어디서 났지요.

답: 제가 평생 벌어둔 겁니다. 은행은 믿지 못해서 그냥 보관하고 있었던 거구요.

문: 그런데 한가지 실수한 것이 있더군요. 돈다발에 100만원 단위로 묶는 띠가 그대로 있지요? 은행 담당자가 돈을 묶고 확인하는 의미에서 자신의 도장을 찍어두잖아요. 그 은행 담당자를 찾아 알아보니 당신이 J시에 오기 얼마전 누군가 한남은행 용산지점에서 1억원을 한꺼번에 현금으로 찾았더군요. CCTV를 통해 1억원 현금을 찾을 당시의 화면과 그 시각에 창구에서 인출된 계좌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그 계좌는 청파그룹 후계자인 박구동 개인이 관리하던 차명계좌로 밝혀졌어요. 돈을 찾은 사람은 박구동의 비서이구요. 그러니까 당신은 박구동으로부터 돈을 받은거지요. 맞지 않나요.

답: (부들부들 떨면서 격한 반응을 보이며) 그건 이 사건하고는 관계가 없습니다.

문: 관계가 없다구요? 박구동의 동생이 실종되었어요. 알아보니 형제간에 상속과 경영권 분쟁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지분으로 따지면 1조원대가 걸린 싸움이었지요. 그런데 말이에요. 그 아버지 박청파씨가 살아생전에 박구동 동생의 유전자 감식을 해놓은 것이 있다더군요. 밖에서 뿌린 씨가 워낙 많아서 자신의 자식인지 확인해둘 필요가 있었던 거겠지요. 지금 그걸 찾고 있어요. 조만간 확보할 것으로 보이는데 그러면 시체와 동일인인지 여부가 나올 거고.

답: 저는 박구동이 누군지 전혀 모르고 만나본 적도 없습니다.

: 그럴 수도 있겠지요. 당신은 박구동으로부터 직접 지시받은 것이 아니라 중간에 제3의 인물이 끼어있을 수도. 그렇지만 이 이 정도면 충분히 그림이 그려지지 않나요. 삼척동자라도 알겠는데요. 박구동이 경영권 다툼으로 동생을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당신이나 또는 당신의 고용주에게 청부살인을 부탁했다. 그 대가로 착수금조로 1억원을 지급했고, 나중에 또 얼마를 주겠다고 했겠지. 당신과 사라진 공범 또는 제3의 인물이 박구동의 동생을 당신의 집으로 유인해 살해한 거야. 아니면 밖에서 죽이고서 시신만 옮겨왔던지. 시체 가슴쪽에 단 한 곳 자창이 있는 것으로 보아 솜씨좋은 칼잡이가 예리한 칼로 한번에 찌른 것으로 보여요. 당신 집에서 살해했다면 욕실이나 세탁기 외 다른 장소에서 피해자가 저항한 흔적이나 혈흔이 나왔어야 할텐데 그런 것이 없는 것으로 보아 밖에서 살해하고 시신만 집으로 옮긴 것으로 보여. 혹시라도 시신이 발견되면 신원을 밝혀내지 못하게 하려고 안전책으로 욕실에서 시체를 토막내 따로따로 버리려 했던 것이고. 혈흔이 묻은 옷은 세탁기에 넣고 세탁을 했겠지. 가방을 미리 준비한 것으로 보아 우발적이 아니라 미리 살인을 계획했을 것이고. 당신은 시신을 몸통과 다른 부위를 나누어 가방에 담은 다음 그것을 버리려고 누군가와 함께 이쪽으로 온거고. 그런데 당신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버릴 장소를 물색하다가 재수없게도 경찰관이 수상히 여겨 차량을 불심검문했던 거고. 그렇지 않나요.

답: 절대 아닙니다. 저는 결코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문: 물론 당신이 죽이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당신은 시체절단과 유기에만 관여되었을 수도 있어. 그렇지만 지금 정황으로 보면 당신은 살인죄를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요. 왜 혼자 다 뒤집어 쓰려고 하지요. 어떤 대가를 받기로 했는지 모르지만 그 사람을 믿을 수 있을 거 같은가요. 그리고 대가를 받는다 한들 최소한 20년쯤, 그 이상 일수도 있고, 교도소에서 썪다 나오면 무슨 의미가 있나. 처자식인들 당신이 그렇게까지 해서 돈을 버는 걸 바라겠어요.

답: (한참 동안 창문 밖 먼산을 바라본다. 밖에선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다. 담배를 피우고 싶다고 하기에 담배 한 대를 건네주고 불을 붙여 준다, 담배 한 대를 다 피워갈 무렵) 검사님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문: 그래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당신과 당신 가족의 운명이 결부된 거니까. 당신 또래의 친구로서 충고하는데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좋을 거에요. 또 당신이 말하지 않더라도 진실은 반드시 밝혀질 테고.

 다음날 양이남은 범행 전부를 자백했고, 동승자와 그 외 공범자들, 박구동 모두 구속되었다. 예상대로 시체는 박구동의 동생임이 밝혀졌다. 국도옆 풀섶에서 쓰레기 봉투에 담겨진 박구동 동생의 나머지 시신도 발견되었다. 동승자가 귀찮아서 그냥 아무데나 버린 것이었다. 박구동이 총 3억원을 주기로 하고 청부살해업자를 시켜 그의 동생을 살해했고, 청부살해업자가 그의 부하인 양이남의 집으로 와서 양이남에게 시체를 절단한 후 유기하도록 지시한 것이었다. 청부살해업자는 양이남에게 큰 여행용 가방을 준비하도록 미리 시켜두었었다. 그들은 아직 영어의 몸이다. 박구동은 횡령, 주가조작 등 또 다른 범행 사실이 밝혀졌고, 청파그룹은 제3자에게 매각되었다.  

 

 

영화 의뢰인중 한 장면

출처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17&aid=0002173263

 

[장면 3]

문: 직업은 무엇입니까.

답: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문: DMZ 안쪽으로는 허가도 받지 않고 왜 들어갔나요. 위험한 곳인데.

답: 사실은 내연녀와 성관계를 가지려고 은밀한 장소를 찾다가 저도 모르게 그곳에 들어간 것입니다.

문: 평생을 그 동네에 사셨으면 그곳 지리를 누구보다 잘 아실텐데요.

답: 그날은 제가 너무 흥분해서 제정신이 아니었나 봅니다.

문: 좋습니다. 실수로 들어갔다고 치고, 그런데 흰머리 독수리는 왜 잡으셨나요.

답: 덫에 걸린 독수리가 있기에 신기해서 잡아온 것입니다.

문: 그 덫은 당신이 놓은 것이 아닌가요.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졌던데, 전문적인 밀렵꾼의 소행이던데요.

답: 제가 놓은 것이 아닙니다. 저는 누가 그 덫을 놓았는지 모릅니다.

문: 그렇더라도 천연기념물을 생포하면 중하게 처벌받는다는건 아시지요.

답: 농사만 짓는 놈이 그런 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독수리가 천연기념물인지 어떤지 알게 뭐에요.

문: 흰머리 독수리는 어떻게 했나요.

답: 뒷산 나무 밑에 묶어 두었습니다.

문: 어떻게 하실 생각었나요. 

답: 독수리가 기력이 없는 것 같아서 제가 좀 돌보다가 놓아줄 생각이었습니다. 

문: 비싼 값에 팔려고 한 것은 아니구요. 

답: 아닙니다.  

문: 당신 집에 꿩, 노루, 수달 등 박제가 여러개 있던데 그건 무엇입니까.

답: 그냥 죽어있는 동물들을 가져다 취미삼아 박제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문: 그런데 당신 내연녀의 밭에 하우스가 있고, 거기에 작업장을 만들어놓았더군요. 도살에 쓰는 온갖 장비가 있던데요. 은밀하게 찾아오는 사람들한테 야생동물 고기와 생피를 판 장부도 있고요. 당신이 내연녀라고 하는 사람은 오래전 혼자 된 여자인데 10년간 성폭행을 당했고, 폭행과 협박에 못이겨 당신 일을 도와주었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답: 아닙니다.

문: 내연녀가 다 실토했습니다.

답: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흰머리 독수리는 다시 날려보냈다. 저 멀리 북녘 땅으로 힘차게 날아갔다. 정보에 의하면 밀렵꾼은 2년의 징역형을 살고 나와 DMZ 일대에서 다시 밀렵 행각을 하고 있다고 한다.

 

 

사진출처 http://blog.naver.com/h2618419?Redirect=Log&logNo=150110407308

 

그렇게 사람들과 실갱이 하면서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가끔씩은 동료 검사들이나 직원들과 싸구려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다 관사에 들어가 쓰러져 잠드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주말이면 서울이 집인 검사들은 서울행 기차를 타러 가기에 바빴고, J시에 남아있는 검사들도 가족들과 여기저기 관광을 다녔지만 그 때까지 노총각이던 나는 지역산악회 회원들과 주변 산들을 돌아다니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어 무료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런저런 사건들이 있었지만 J시는 대체로 평화로웠다. 적어도 한 사람과 해후하기 전까지는

Posted by lawm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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