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봄, 죽음과 맞닿은 계절

 

부임한 둘째 해, 어느덧 봄의 전령이 대기중에 따스한 열기를 뿌리고 있다. 검사실 앞 정원엔 민들레, 연산홍, 라일락 등 형형색색의 꽃들이 진한 색깔을 다투어 뽐내고 있고, 그 위에 내려쬐이는 맑은 햇발이 사무치다.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면 울컥 눈물이 날것만 같은 5월의 어느 주말이었다.  

당직 근무여서 새벽 일찍 근처 구악산 산행을 마치고 텅빈 청사를 지키며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주말 당직은 검사들이 순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맡고 있다. 그날은 내 순번이 아니었지만 선배 검사가 서울에 급한 용무가 있어 순서를 바꾼 터였다. 당직은 가끔씩 관내 경찰서에서 지휘 건의를 올리는 영장청구, 석방지휘, 변사사건 등을 검토하는 것이 주요 일과였다. 나는 관내에서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모처럼 토스토예프스키 전집중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꺼내들고 있었다. 그러나 주말에도 사건사고는 늘 일어나게 마련이어서 조용히 지나갈 수는 없었다. 오후쯤 일직인 최대일 주임이 H 경찰서에서 품신을 올린 변사사건 기록을 들고 왔다.

 

출처 http://blog.naver.com/mi2591/140128671725

(위 사진은 본문 내용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봄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얼었던 땅이 고무처럼 말랑말랑해질 때쯤이면 유난히 자살사건이 많았다. 주로 목을 매거나 농약을 마시고 죽는 경우가 많았고 벼랑이나 강물, 호수에 뛰어드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세상을 견디지 못해서 였을까, 아니면 그 아름다운 세상과 영원히 함께 하고 싶어서 였을까. 죽은 자들 모두는 말이 없으니 그 헤아릴 수 없는 비밀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문헌을 통해 생의 마지막 순간에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의 증언을 들어본 적이 있고, 나 또한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죽기 일보직전에 생환했던 체험을 한 적이 있다. 종합해보면 추락하다가 어떤 물체와 충돌할 때까지, 숨가쁨이 시작되어 정신을 잃을 때까지 등등 이승의 끝지점에서 저승에 이를 때까지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에서 본인에겐 아무런 육체적 고통이 없다는 것이고,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의 고통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또 그 순간 유한의 세상에서는 알 수 없는 열락(悅樂)의 환희를 보았다고도 하고, 평생의 행복했던 순간들이, 심지어 어머니의 웃음을 보고  까르르대던 어린 아기 때부터 죽지 않았으면 도달했을 미래의 어느 순간까지도 단 몇초 사이에 다시 한번 생생하게 살다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그 또한 죽음을 설명하는 극히 일부의 현상일 뿐이고, 살아나는 순간의 환상일 수도 있어 생과 사를 이해하는데 충분하다고 할 수 없다. 결국 스스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절벽에서 발을 떼어 죽음 쪽으로 완전히 넘어가기 전까지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채 5분도 걸리지 않는 그 경계를 우리는 한 100년쯤 멀리에나 있는 것처럼 착각하며 살고 있다. 물론 그 착각 덕분에 우리는 이순간에도 악착같이 발버둥치며 살고 있고, 인간의 역사 또한 그로 인해 발전해 왔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봄은 희망, 행운, 시작의 상징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오히려 봄은 역설적이게도 절망, 불행, 마지막으로 가득한 시기이다. 자신의 몸뚱아리조차 알아 볼 수 없는 새까만 토굴 속에 숨어 있던 도망자는 비밀의 문을 열고 들이닥친 빛의 손길에 모든 죄악이 드러났을 때 자포자기할 것이다. 그와 같이 봄은 너무나 찬란하여 내 안에 깊숙이 웅크리고 있던 외로움, 슬픔, 가망없음을 낱낱이 비추고 생의 열정은 추악한 자신의 모습을 보는 순간 산산이 부서지고 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봄은 죽음의 유혹에 가장 맞닿아 있는 계절이다. 자살한 사람들의 변사사건 기록을 볼 때마다 나는 쓸데없는 상념에 잠시 넋을 잃곤 했다. 최대일 주임이 놓고간 변사 기록을 훓어보았다.

  • 변사자: 민영주(여, 37세)

• 직 업: 유흥주점 마담

• 발견자: 김옥금(여, 53세, 민박집 운영)

• 발견경위: H 강변에서 ‘강가의 하얀집’이라는 상호로 민박집을 운영하는 김옥금이 금일 아침 7시경 그녀의 남편과 함께 밤새 강물에 쳐둔 그물을 건져내기 위해 강가로 가던중 이상한 물체가 떠있어 확인해보니 사람의 사체인 것을 확인하고 신고하였음.

• 수사내용:

- 김옥금 및 민영주가 데리고 온 일행들의 진술에 의하면 민영주는 H시에 있는 ‘여왕벌’이라는 단란주점 마담으로 전일 그녀가 데리고 있던 업소 아가씨들 3명(차도연, 양춘희, 김예미)과 함께 단합대회를 왔다가 김옥금이 운영하는 위 민박집에 전날 17:00경 투숙하였음. 참고로 민영주와 그 일행의 단합대회는 민영주의 갑작스러운 제의로 이루어졌고, 주변을 드라이브 하면서 경치 좋은 곳을 찾다가 위 민박집에 방 하나를 빌려 투숙하였다고 함. 김옥금도 처음 보는 손님들이었다고 함.

- 민영주는 전날 저녁 일행들과 함께 김옥금이 만들어준 닭백숙을 안주삼아 소주, 맥주 등 많은 술을 마셨고, 양춘희, 김예미는 저녁 12시경 잠자리에 들었으며, 민영주는 새벽 2시경 마지막까지 술자리에 남아 있던 차도연과 함께 간단한 세면 후 잠자리에 들었음.

- 함께 온 아가씨들도 민영주가 언제 방을 나갔는지 전혀 모르고 있고, 인근을 탐문하였으나 민영주를 목격했다는 사람은 없음.

- 사체 검시한 바 사체의 얼굴, 팔, 다리 부위에 약간의 찰과상이 있으나 물에 빠져 강물에 떠내려오면서 바위에 부닥쳐 생긴 상처로 보임. 발견 당시 상의는 얇은 겉옷, 하의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음. 신발은 벗겨진 상태로 맨발에 전신이 하늘을 향해 물위에 떠 있었음. 그 외 타살 흔적 등 특이사항 없음

- 변사자가 잠자리에 들었다는 새벽 2시경을 사망시간으로 잡고, 강물 위의 바위, 나무 등 장애물이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H강의 유속을 감안하여 변사자가 떠내려온 최초의 지점을 역추적하면 아무리 멀리 잡아도 상류 5킬로미터 이내임. 그러나 H강은 바닥이 페여있어 소용돌이치는 부분이 많고, 바위, 나무 등 장애물도 많아 실제 사고지점은 발견지점에서 상류 3킬로미터 이내일 것으로 추정됨

- 발견지점에서 상류 3킬로미터 까지 따라가 본 바 강변길이 끊어진 곳이 있기는 하나 조금 멀리 우회로가 있어 상류 3킬로미터 이내 강가중 전혀 접근이 불가능한 지점은 없음. 다만 면밀한 수색에도 불구하고 신발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음. 물에 빠지면서 벗겨져 떠내려갔거나 가라앉았을 가능성이 많음.

- 민영주가 운전해온 벤츠 승용차는 처음 주차한 장소에 그대로 있었고, 승용차 키도 방안에 두고간 자신의 백안에 있었음. 신발은 흰색 운동화였다고 함.

• 의견: 민영주가 민박집에서 많은 술을 마셨고 술에 취해 동료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던 점, 민박집에서 술을 마시면서 시종 화기애애한 분위기였고, 술자리에서 서로 간에 흔히 있을 수 있는 말다툼이나 실랑이도 전혀 없었던 점, 평소 민영주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적도 없고, 항상 밝은 성격의 소유자로서 아가씨들에게도 친절하게 대해주었던 점, 특별히 남자관계도 없었고, 손님들과 원한을 살 만한 일도 없었던 점, 주변 불량배들로부터 강간당했을 가능성도 검토해보았으나 옷을 벗긴 흔적이 전혀 없는 점, 사체의 상태가 비교적 깨끗하고 비공(콧구멍) 및 구강에서 익시시 흔히 볼 수 있는 백색 거품이 발견된 점, H강에는 곳곳에 급류가 많고 위험한 장소가 많아 익사하는 사람이 많은 점 등을 종합해보면 변사자 민영주가 술기운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강가를 산책하다가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강물에 빠져 급류에 휩씁리면서 익사한 것으로 판단됨. 사체는 유족에게 인도하고 내사종결하고자 함.

 

 

                                     출처 http://chenggi15.blog.me/130081594372

 (사진은 본문 내용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경찰의 의견만으로도 특이 사항은 없었고 전형적인 익사인 것이 분명해 보였다. 자세한 수사내용으로 보아 더 수사할 것도 없어 보였다. 익사의 경우 눈에 띄는 외상이 없다면 자살 또는 사고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누군가 타살을 가장하거나 고의로 밀어 빠뜨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나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고 여러 정황에 비추어 이번 경우도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의견대로 처리할 것'이라고 한마디 지휘문구를 기재하고 나면 나는 편안한 하오를 즐길 수 있다. 그래도 혹시나 억울한 죽음이 있어서는 아니되겠기에 또 한 점 의혹이라도 남아 있다면 밝히는 것이 검사의 직무이므로 한페이지 한페이지 집중해서 읽어나갔다.

관련자들의 진술조서, 각종 수사보고서를 거쳐 변사사건 기록 뒤쪽으로 페이지를 넘기자 물에서 건저져 영안실에 안치될 때까지의 사체 사진 몇장이 눈속으로 들어왔다. 멀리 물 위에 떠있는 모습, 건져져 땅에 뉘었을 때의 모습, 영안실에서의 모습 등 죽음 이후의 과정들이 시간순서대로 편철되어 있었다. 영안실의 철제 침대 위에 뉘여진 사체는 검시를 위해 벌거벗기워져 있었고, 얼굴, 전면, 후면, 양측면을 근접 촬영한 것이었다. 클로즈업된 사진 속 사체의 온몸에서는 어릴적 공동묘지에서 보았던 도깨비 불을 연상시키는 푸르스름한 빛이 감싸고 있었다. 과학적으로 설명한다면 체온의 급격한 하강으로 인해 근육이 경직된 것일 수도 있고, 시반이 형성되는 과정일 수도 있으며, 사진 촬영시의 배경이나 노출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과학적 논리 이전에 그 푸른 빛은 마치 영혼의 기운이 서서히 몸 밖으로 빠져나오는 것처럼 보여 나는 순간적으로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눈이 감겨진 얼굴은 한없이 평온한 듯 하였다. 사진상으로도 특이점은 없었다. ‘그녀는 어떤 치열한 삶을 살아왔을까. 마지막 순간에 어떤 생각들을 하면서 삶을 마감하였을까. 그리운 사람들을 떠올렸을까. 이루지 못한 꿈들을 아쉬워하였을까.’ 나는 조금이나마 죽은 자와 대화하려고 안간힘을 써보며 사건의 실체와는 관계없는 상상에 사로잡혀 다시 한 번 사진 속의 얼굴을 보았다. 그 때 나는 번개가 심장을 뚫고 관통한 듯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오래 잊고 있었던 한 여자의 얼굴을 본 것이다.

한 때 우스개처럼 하나의 자일에 묶인 우리는 함께 목숨을 나눈 사이라고 했던 여자, 그러다가 정말로 목숨까지도 함께 나누고 싶었던 특별한 여자, 숨결과 자일을 통해 전해지는 감촉만으로도 그녀의 영혼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여자, 아픈 개인사를 내면에 품고도 씩씩하게 살았던 착한 여자, 마지막 밤 나에게 처녀성을 빼앗기고도 쑥스러워하는 나를 위로해주고 웃어주었던 여자, 어느날 한마디 말도 없이 홀연히 사라져버려 그리움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마음속에 남아 있던 여자, 17년 전의 그 여자 민주란.

시간이 흘렀지만 젊은날 그 모습 그대로였다. 머리가 풀어헤져지고 변사자라는 선입견만 가지고 보아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사진속 얼굴은 민주란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설마! 아니겠지. 이름이 다르고 세상에 어슷비슷한 얼굴은 부지기수 일터이므로 그럴리는 없을거야’ 나는 다시 평상심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보면 볼 수록 민주란이 내게 어서 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꼭 직접 확인해보아야만 할 것 같았다. 나는 최대일 주임을 통해 경찰에 연락하여 검사가 직접 검시할 예정이니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나는 관용차로 H 의료원으로 가는 내내 그녀가 아닐 것이라는 이성의 확신과 그녀가 틀림없다는 본능적인 불안 사이에서 주체할 수 없는 떨림으로 주변의 풍광도 보이지 않았고, 차창 밖에서 부는 따스한 봄바람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1시간 후쯤 H의료원 영안실에 도착하였다. H경찰서 과학수사대 감식반의 홍반장과 병원 관리인의 안내를 받아 영안실에 들어갔다. 홍반장은 이곳 과학수사대에서만 20년 넘게 근무하였고, 곧 정년퇴직을 앞둔 이 분야에서는 베테랑이었다.

허름한 시골 병원의 영안실은 포르말린 냄새로 진동했고, 희미한 백열등이 드리운 그림자는 무덤속을 연상케 하였다. 영안실 관리인이 극히 사무적인 태도로 시체보관소에서 번호를 확인하더니 사체를 넣어둔 냉동고의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여닫이 사체 보괌함에서 하얀 모포에 뒤덥힌 사체를 꺼내에 철제 침대 위에 뉘였다. 홍반장이 비닐 장갑을 끼고 천천히 머리쪽부터 모포를 벗겨내었다. 세월의 풍파에 그토록 아름답던 미소가 조금 시들해지기는 했지만 민주란이 틀림없었다. 나는 재빨리 오른쪽 뒤 허리부분을 살펴보았다. 민주란이 선등을 서고 내가 아래에서 확보할 때면 민주란의 웃옷이 올라가 언뜻언뜻 드러난 허리께에서 보였던 검은 점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마치 누가 일부러 그려놓은 것만 같았다. 그녀임을 확인하고서야 불안했던 마음은 오히려 담담해질 수 있었다.

‘이 죽음은 결코 용납할 수 없어. 어딘가에서 잃어버렸을 나의 한조각을 반드시 찾아줘, 마지막 부탁이야’ 민주란은 내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Posted by lawm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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