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새로운 시작

 

1. 부임(赴任)

 2002년 2월 초순경, 바깥 공기를 쐬기 위해 숨겨둔 목을 뺀 거북이처럼 목도리로 칭칭 동여맨 얼굴을 내밀자 드러낸 코끝이 따갑다. 매서운 바람이 거리 골목골목을 휘감으며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았음을 경고하고 있다.

 길 양옆으로 끝없이 이어져 있는 이름 모를 산들은 겨우내 내린 눈을 하얀 외투 삼아 꼭꼭 속살을 감춘채 우람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도로가 상점 주인들이 급하게 치운 눈이 가을걷이가 끝난 논 위의 나락 더미처럼 길가에 듬성듬성 쌓여있다. 평일 J시로 가는 국도는 스산한 늦겨울의 정취를 내뿜으며 그 위를 달리는 차들을 빠르게 빨아들이고 있다. 국도 옆 나란히 이어진 철로 위를 10량 남짓 텅빈 객차로 연결된 무궁화호 열차가 힘겹게 나아가고 있다. 차창문을 열자 덜컹거리는 열차바퀴 소리가 불쑥 침입해 들어온다. 라디오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헨델의 사라방드를 덮어버리더니 세상 모든 소리를 짓누르듯 굉음을 토해낸다. 열차바퀴의 굉음에 편승하여 들이닥친 칼바람이 나의 뇌수를 쪼으고 달아난다.

이 길의 끝에선 또 어떤 괴물이 기다리고 있을지, 이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것이란 차디찬 예감에 몸서리 친다. 레테의 강물을 마시고 명계로 떠나는 망자처럼 낯선 세상에 내던져진 막막함에 사로잡힌다.  

                                        사진출처 http://blog.naver.com/dmzlife?Redirect=Log&logNo=10099586312

 

그리스 신화에서 미로에 갇혀 괴물 미노타우로스의 밥이 될 운명에 있던 테세우스는 그를 사랑한 크레타의 왕녀 아리아드네로부터 검과 실을 받아 그 실의 끝을 미궁의 입구에 매어놓음으로써 길을 잃지 않고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퇴치한 다음 무사히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고 하였다. 나는 미궁 속으로 빨려들어가 그 속에서 영원히 길을 잃는다 하더라도 빠져나올 것을 대비하여 생의 입구에 실을 묶어두지는 않으리라. 과거는 모두 지워졌고, 이제 새로운 길을 가야 한다. 앞으로 앞으로 나아갈 뿐, 그러다 벽을 만나면 부수고 나아가리라. 깊은 상념 끝에 폐부 깊숙히에서부터 심호흡을 한다. 아무 것도 채워지지 않은 생의 도화지에 세월의 날줄과 씨줄이 새롭게 채워질 것이다. 

나는 몇 년간의 우여곡절 끝에 사법시험에 삼십 초입의 늦깍이에다 성적도 턱걸이로 겨우 합격했고, 얼치기 법조인으로 그럭저럭 2년간의 사법연수생 신분을 거쳐 검사로 임관받아 첫 발령지인 J지방검찰청에 부임하러 가는 중이었다.                            

그 몇 년간의 우여곡절에 대해 간략히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간략히’라고 하여 그 시절이 내게 별다른 가치가 없었다거나 꼽을만한 이야기거리들 없이 순탄하게 지나갔다는 뜻은 아니다. 세월이란 지나고 나면 모두 저 멀리서 반짝거리는 보석이 되어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유혹하기 마련이고, 때문에 거처온 시절들중 소중하지 않은 순간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이 글의 주인공인 민주란과는 절연된 시간들이었고, 그 절연된 시간 동안 벌어진 일들과 민주란과는 별반 관련 있는 것도 아니기에 궁금증을 푸는 차원에서 가볍게 요약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나는 입대후 훈련병 생활을 거쳐, 수방사 예하의 어느 부대로 배정받아 갔고, 낮에는 충정훈련(시위진압훈련)으로 밤에는 선임병들의 연애편지를 대신 써주는 것으로 나날이 지나갔으며, 다행히 시위현장에 실전 투입되는 일이 없었던 것을 안도하며 제대할 수 있었다. 그 사이 밖에서는 연일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었고, 드디어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는 6.29 선언이 있었으며, 88 올림픽이 성대히 치러졌다.

제대후 적성에 맞지 않더라도 일단 졸업이나 하자고 마음먹었고, 또 그렇게 마음 먹으니 학과 공부도 해볼만하였다. 학사경고를 면하는 정도로 대학생활을 마무리하였고, 여의도에 있는 H 기업 모 계열사에 취직하여 2년 가량 다녔다. 어느날 밤 한강에서 혼자 오리 배를 타고 소주 2병을 들이킨 다음날 사표를 냈고, 그 동안 모은 돈으로 신림동 고시원에 들어가 사법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세월은 더 이상 목적 없는 방황을 허락하지 않았고 어떻게든 이 사회에 틈입해야만 했기에 대학졸업, 취업, 사법시험 준비라는 구체성을 띈 일련의 과정을 하나하나 통과해 갈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나만의 길이 아니라 대부분의 평범한 남정네들이 가는 길이기도 했다. 달리 말하면 나의 무능 또는 용기 없음으로 인해 통상의 길에서 벗어난 다른 도전은 감히 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사법시험 준비가 색다른 선택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으나 실상은 쥐꼬리만한 급여를 받기 위해 대기업 오너의 머슴으로 살고 있다는 자괴감이 발동하여 거의 오기로 사직서를 내던졌을 뿐 엄청난 대의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내내 후회와 불안함에 잠못 이루는 밤이 많았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합격자 명단에서 내 이름 석자를 확인하였을 때에는 성취의 기쁨보다는 다시 백수의 길로 들어서는 일은 없을 것 같은 안도가 더 앞섰다.

그렇게 당장의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절박함, 남들에게 뒤처지고 싶지 않은 오기는 적어도 외형상으로는 건강한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취득하는 데에 매우 유용한 동력이었다. 그것이 내 의지이든, 타의(체제까지도 포함한 광의의 의미에서)에 의해 떠밀린 것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정신의 순결함이나 선한 의지 따위는 실낱같은 목숨을 부지하는 데에는 별반 쓸모가 없다는 현실적인 교훈은 앞뒤 잴 것 없이 무작정 달리게 만들었고, ‘미리 정해둔 피니쉬 라인에 다다르기만 하면 된다’라고 스스로를 채찍질 했다. 인생의 종착역은 죽음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망각하기라도 한 것처럼 목전의 과실에만 탐을 내었던 것이다. 따먹고 나면 금방 허기질 것인데도 말이다. 설계도 없이 무작정 벽돌 하나하나를 쌓아 놓고 보니 어느덧 집이 되어 있었다고나 할까. 그것이 곧 부서질 모래성일지라도 일단은 만족해 하면서......

그동안 우리들 친구들은 어찌 되었나 잠깐 살펴보기로 하자. 숙희는 내가 입대한 후 질책과 우려로 가득한 편지를 몇차례 보내왔다. 나는 답장을 하지 않다가 숙희의 면회까지는 거절할 수 없었다. 숙희는 나를 보자마자 ‘자신이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러는건지, 사고라도 난 것은 아닌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며 눈물을 터트렸다.

나는 ‘미안하다, 사실 나는 너에게 친구 이상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의 정제되지 않은 감정 때문에 너에게 상처를 줄지도 모를 거란 예감이 들었다, 또 너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무력한 내가 싫기도 했다, 너에게 어울리는 사내가 되고 싶었다, 그래, 사실은 너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오래도록 함께 하고 싶었기 때문에 일단 떠나기로 한 거다, 그러나 그 떠남은 오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라고 생각했다’라고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다.

결국 나는 숙희 앞에서 다시는 너를 떠나는 어리석은 짓은 하니 않겠노라고 다짐하면서 무릎을 꿇었고, 숙희는 조용히 나의 손을 잡아주는 것으로 나의 무례를 용서하였다. 전화위복이라고 했던가. 그 후 우리는 조금은 연인 쪽으로 더 다가가 있었다. 그러나 완벽하게 나의 여자로(또는 그녀의 남자로) 만들지 못한 탓이었으리라. 숙희는 졸업후 이 땅을 떠나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는 그녀의 바램대로 파리 3대학으로 유학을 갔고,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 그 사이 숙희는 파리 현지인과의 열렬한 사랑이 있었던 듯 하고, 그 사랑이 깨어진 다음 비장하게 ‘더 이상 너를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선언을 했었다.

나는 ‘괜찮다, 나는 괜찮다, 언제까지고 너를 기다리겠다’고 짧은 답신을 하기는 하였지만 숙희는 내곁에서 영영 떠나버렸음을 짐작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고향 마을 600년 묵은 탁수나무 아래에서 함께 찍은 사진을 버리지 못하고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민주란은 내가 군입대후 얼마 되지 않아 졸업도 하지 않은채 소리 소문없이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한학기를 남기고 휴학 했으나 끝끝내 학교로는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저기 수소문해보았지만 아무도 그녀의 소식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와의 마지막 등반이 있었던 밤에 ‘졸업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마도 남미로 이민간 외삼촌 가족을 따라 갈지도 모르겠다’고 넌지시 내비쳤었던 적이 있었기에 그녀 또한 외국 어딘가에 살고 있을 거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그러나 감쪽같은 그녀의 부재는 마음 한편에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 없게 하였다.

혼자 한 등반길에 그녀가 앞서 올라가고 있는 환영을 보았고, 나도 모르게 ‘선배, 잘 살고 있겠지?, 잘 살아야되, 언제까지나’라고 소리친 것을 마지막으로 머나먼 기억속의 여인으로 차츰 잊혀져 갔다. 그러나 생의 어느 구비에선가 한번 쯤은 우연히라도 만나리라는 희망까지 버릴 수는 없었다.

동규는 농수산물 시장에서 청과상을 인수해 운영하고 있었고, 상민은 그 나이에 벌써 시행사를 차려 상당한 부를 축척하여 술값은 도맡아 내고 있었다. 정식은 국전에 몇 번 입상하여 화단의 총아로 떠오르고 있었다. 영곤은 한센병 환자와 함께 한다며 소록도로 떠났다. 인철은 도봉산 밑에서 등산 장비점을 차려 돈을 모아 연례행사처럼 7대륙 최고봉들을 정복해 가고 있었고, 석주는 고향으로 내려가 면소재지에 동물병원을 차렸다. 강충모 형은 대기업에 취직하였고, 장태산은 외제차 딜러로 일하면서 주말엔 등산학교 강사로 일하고 있었다. 모두들 각 분야에서 나름의 영역을 구축하면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아 참, 순이의 소식도 전해야만 할 것 같다. 순이는 봉제 공장에서 만난 10살이나 많은 농아자와 결혼하였다. 회사를 때려치우고 잠시 고향에 내려가 있을 때 골목에서 아기를 안고 있는 순이를 만났었다. 나는 순이에게 다가가 “잘 있었니, 애기가 순이를 닮아 예쁘구나“라고 하였다. 순이는 다행히 아기는 정상인이라고 자랑스러워 했다. 순이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반가운 모습을 감추지 못하였다. 어릴적 순수하고 밝은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었고, 나는 마음의 짐 하나를 덜 수 있었다. 진심으로 그녀의 행복을 빌었다. 우리는 한참 동안 마주보며 웃기만 하였다.

자! 이제, 다시 나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얼마전 구입한 중고 아반떼 트렁크에 전 재산인 도스또예프스키 전집 몇권, 옷가지 몇 벌, 어머니가 새로 사주신 침구세트를 싣고 서울에서 1시간 30분 남짓 거리의 J시를 향해 구불구불 이어진 국도를 달리고 있다. 과천 법무부에서 장관으로부터 임명장을 받고 구내식당에서 점심 식사후 출발하여 J시에 도착했을 때는 짧은 겨울해가 산등성 위에 걸려 힘겹게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을 때였다.

그날 다른 청에서 전근온 검사들에 섞여 부임신고를 하였다. 검사장실 벽면에는 ‘日月無私照(해와 달은 사사로이 비추지 않는다)’라는 글귀가 적힌 현판이 우리를 엄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사장으로부터 몇마디 훈시를 듣고 312호 검사실로 배정받아 갔다. 참여계장과 여직원이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책상 하나와 작은 소파 몇개가 놓여 있는 집무실에 들어가 책상앞 의자에 앉아 보았다. 검찰청 로고가 있는 바탕에 정성스레 글귀를 적어 넣은 종이 한 장이 책상을 덮은 유리 밑에 놓여 있는 것이 보인다.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나는 이 순간 국가와 국민의 부름을 받고

영광스러운 대한민국 검사의 직에 나섭니다.

공익의 대표자로서

정의와 인권을 바로 세우고

범죄로부터 내 이웃과 공동체를 지키라는

막중한 사명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나는 불의의 어둠을 걷어내는 용기 있는 검사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따뜻한 검사

오로지 진실만을 따라가는 공평한 검사

스스로에게 엄격한 바른 검사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혼신의 힘을 다 해

국민을 섬기고 국가에 봉사할 것을

나의 명예를 걸고 굳게 다짐합니다.」

조금은 유치하여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는 그렇게 검사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Posted by lawm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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