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뜨거운 한낮

 

며칠 후 홍반장이 검사실로 찾아왔다.

“검사님, 부검결과가 나왔습니다. 아직 정식 문서로 보내온 건 아니지만 제가 국과수에 미리 알아보았습니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결과가 어떤가요.” 나는 흥분을 애써 감춘채 무심한척 물어보았다.

“직접적인 사인은 익사가 맞습니다. 그런데 죽기 전에 독극물을 주입한 것 같습니다.”

“독극물이라구요? 어떤 독극물입니까”

사이안산이라고 하는 건데, 쥐나 벌레를 잡을 때 많이 사용하는 약물입니다. 금속용접이나 전기도금, 사진인화, 합성고무의 제조로 널리 사용되기도 하구요.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농촌지역에서 그라목숀과 함께 다른 독극물보다 구하기가 쉬워서 자살의 목적으로 많이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민주란이 자살을 하기 위해 스스로 독극물을 주입했고,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강물에 빠졌다는 것인가요.”

“사이안산을 주입하거나 마시면 호흡곤란과 경련을 일으키다가 의식을 잃게 되고 대부분은 10분 내에 사망에 이릅니다. 거기다가 직접적인 사인이 익사인 걸로 보면 강물에 빠지기전 독극물이 주입된 게 틀림없습니다. 민주란이 자살하기 위해 독극물을 미리 준비해두었을 수도 있고, 누군가 강제로 주입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사체 색깔이 선홍색에 가까운 푸른색을 띄고 있는 것도 약물중독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자살이라면 굳이 주사기로 주입했을까요, 그냥 약물을 마시면 간단했을텐데요”

“그렇습니다, 주사기로 주입한 것을 보면 누군가 강제로 그렇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살이라고 하더라도 약물을 마실 경우에는 독극물에 대한 거부감이나 특유의 냄새 때문에 두려움이 더 심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사기를 이용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주사기로 주입한 것만으로 100% 타살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어쪃든 결론적으로 자살이든 타살이든 독극물이 주입된 상태에서 강물에 빠졌고, 독극물로 인해 사망에 이르기 전 익사로 사망하거나 또는 두가지 요소가 합쳐져서 사망했다고 볼 수 있겠군요, 그렇다면 독극물이 어떻게 주입되었고, 왜 강물에 빠지게 되었는지 밝히는 것이 이번 사건의 열쇠 같습니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검사님”

“그 외 다른 특이사항은 없던가요”

“저희가 사체 검시할 때 사체의 왼쪽 어깨 부분에 울혈이 심하지 않았습니까? 부검결과를 보니까 왼쪽 어깨와 왼쪽 가슴 근육이 심하게 파열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특별한 외상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는 민주란이 왼쪽 팔을 무리하게 사용하였던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지난 번 다리 난간에 있던 손바닥 흔적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요? 예를 들어 지난번 말씀하신 것처럼 마지막 순간에 왼손으로 다리 난간이나 어떤 물체에 힘겹게 매달려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다리 난간에 있던 흔적에서 지문은 나타나지 않아서 그 흔적이 민주란이 것이라고 확신하기는 이릅니다. 다만 남아 있는 자국으로 보아 다리 아래쪽에서 왼손으로 잡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게 민주란이 왼손으로 잡고 있던 흔적이 맞다면 민주란은 왼쪽 팔로만 다리 난간에 매달려 있다가 추락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떨어지면서 어떻게 난간을 잡을 수 있었을까요, 만약 스스로 뛰어내렸다면 그건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추락은 세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발을 헛디뎠을 때를 비롯해서 불의의 사고인 경우, 스스로 몸을 던졌을 때, 다른 사람이 뒤에서 밀거나 집어던졌을 때입니다. 추락하는 사람의 몸무게, 스스로 뛰어내릴 경우 얼마나 멀리 뛰었는지 또 최초 추락 지점의 구조 등에 따라 다르겠지만 통상의 경우 누군가 밀었을 때 낙하지점은 추락지점에서 가장 멀리 떨어지고, 발을 헛디뎠을 때 가장 가까이 떨어집니다. 민주란은 물에 떨어져 추락의 충격이 남아 있지 않았고, 강물에 떠내려왔기 때문에 낙하지점이 정확히 어디인지 밝힐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낙하지점의 거리로 자살이냐 타살이냐를 밝히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난간을 잡고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적어도 누군가 강물로 집어던지거나 밀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하지만 민주란을 집어던지지는 않았더라도 누군가 밀었을 경우 떨어지지 않으려고 저항하다가 난간을 잡게 되었을 수도 있고, 추적을 피해 다리 바깥으로 나가 난간을 잡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만 그건 아주 예외적인 경우이겠지요, 민주란이 추적을 피하고 있었다거나 누군가 곁에 있었다는 증거도 아직까진 전혀 없구요, 그리고 곧바로 뛰어내리지 않고 조심스럽게 다리 바깥으로 나갔다가 막상 뛰어내리기가 겁이 나 되돌아 나오는 과정에서 난간을 잡게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예외적인 경우라 하더라도 무조건 배제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수사해야 하지 않을까요”

“알겠습니다, 검사님, 그런 점 또한 충분히 참작해서 수사하겠습니다.”

“사건현장 주변 수색도 좀더 면밀히 해보시구요”

“네, 검사님”

 

 

(영화 의뢰인의 한 장면)

 

사인이 익사라면 독극물로 인해 사망에 이르는 시간을 고려해 볼때 민주란은 다리 부근에서, 적어도 10분 이내의 거리에서 독극물이 주입되었고 강물에 떨어져 익사한 것이다. 다리 난간에 남아 있던 흔적이 민주란의 것이라면 민주란은 몇분 가량 왼팔만으로 다리 난간을 안간힘을 다해 붙잡고 있다가 강물에 떨어진 것이다. 암벽등반 전문가인 민주란은 충분이 그렇게 할 수 있다. 다만 독극물이 몸속에서 퍼지고 있던 상태라 의식을 잃어갔을 것이고, 힘에 부쳐 올라오지 못하고 손을 놓쳐 떨어졌을 것이다. 한가지 의문은 오른손은 왜 사용하지 못하였을까 하는 것이다. 아마도 오른손의 시련과 관련이 있을 것 같지만 아직은 알 수 없다. 그리고 발을 헛디뎟거나 스스로 떨어진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 타살하려고 했던 것인지도 확정할 수는 없다. 물론 이것은 다리 난간에 흔적이 있는 지점에서 떨어졌을 경우이다. 다른 지점에서 강물에 빠졌을 수도 있고, 그렇다면 이와 같은 가정은 무의미하다.

나는 민주란의 마지막 10여분을 대략 추리해보았다. 이제 자살이든 타살이든 민주란이 거기에 이를 수 밖에 없었던 과정을 추적해야한다. 내가 그녀를 마지막 본 그날 밤부터 17년의 세월 전부를 추적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나는 사건의 실타래를 풀기가 그리 쉽지 않음을 직감했다.

  

“민주란의 유족들은 찾았나요.” 내가 잠시의 침묵을 깨고 다시 홍반장에게 물었다.

“어머니는 사망했고, 아버지 민영태는 오래전 외국에 나가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말레이시아로 출국한 기록은 있는데 입국한 기록은 없습니다. 말에이시아 대사관에도 알아보았는데 재외동포중 그런 사람은 없다는군요. 관광비자로 나갔다가 눌러앉았거나 제 3국으로 밀입국하여 살고 있을수도 있구요. 그리고 다른 일가붙이로는 민주란의 어머니 동생, 그러니까 민주란의 외삼촌이 한명 있는데 칠레에 이민간 것 같구요. 그쪽 대사관을 통해 국제전화로 어렵게 연락을 했습니다. 곧 입국할 것 같습니다.”

“민영주는 실제 인물이던가요.”

“네, 실존인물인 거는 맞는데, 적어도 호적상 민주란과 연관은 없습니다”

“민영주가 어떤 인물인지는 파악이 되었나요”

“아직 찾지는 못했습니다. 주민등록상 마지막 주소지가 서울 홍은동으로 되어 있었고, 3년전 말소된 상태입니다. 민박집에 두고간 휴대폰도 민영주 명의로 가입한 건데, 그 외 민영주 명의로 가입된 휴대폰이 있나 조사해 보았지만 없었습니다.”

“현재로선 민영주를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군요”

“그렇습니다. 민영주의 휴대폰 통화내역이나 발신지 위치 결과 내역이 나오면 본격적으로 밝혀질 것 같습니다.”

“민주란 뿐만 아니라 민영주의 행적에 대해서도 계속 조사해보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민주란의 주소지는 확인해보셨나요”

“네, 민주란은 주소지가 목포 어딘가로 등록되어 있는데, 최근에는 실제 거기에 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주민등록상 민주란과 민영주가 함께 거주한 흔적은 없구요”

“현재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과 어떤 관련이 있던가요”

“아직 거기까지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곧 확인해보겠습니다”

민영주와 민주란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단순히 민주란이 민영주의 인적사항을 도용하여 사용하고 있었을 뿐인가. 아니면 둘 사이에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는 것일까.

 

며칠후 민주란의 외삼촌 홍도규가 입국했다. 나이는 50대 중반쯤 되어 보였고, 다른 가족은 비행기값 때문에 오지 못한 것이나 차림새로 보아 칠레에서의 이민생활이 그리 여유롭지만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홍도규의 입국으로 장례절차를 진행할 수 있었고, 나는 그제서야 산악회 회원들에게 민주란의 죽음을 알렸다. 장태산, 강충모, 인철, 석주 등10여명이 만사 제쳐놓고 부랴부랴 달려와 민주란과의 마지막을 함께 해주었다. 갑작스런 민주란의 부음에 모두들 너무 놀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산악회 회원들도 민주란이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사라졌다는 것 외에 그 후 그녀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거의 알지 못하였다. 살아있는 우리들조차 가끔 안부전화를 하다가 그마저 끊긴지 오래되었다. 너나 없이 졸업후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을 것이다. 결혼하고 새롭게 생겨난 부양 가족들을 돌보느라 정신없이 세월의 강을 떠내려왔을 터였다. 1년에 한두번 재학생과 졸업생 합동 산악모임이 있기도 했고, OB 산악회가 운영되고는 있었지만 나도 거의 나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란이라는 공통된 기억을 매개로 해서야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민주란에게로 오는 길은 잠시나마 20대의 풋풋했던 시절로 되돌아 오는 길이었을 것이다. 아름다웠던 한 때, 태양이 이글거리던 뜨거운 하오였던 우리 인생의 정점을 향해.

 

 

사진출처 http://blog.naver.com/wj21858?Redirect=Log&logNo=20126264692

 

“어떻게 된거야?” 모두들 갑작스런 민주란의 부음을 받고도 꿈을 꾸듯 비현실감 속에 있다가 영정 사진을 보고서야 비로소 깨어난 사람들처럼 이구동성으로 내게 먼저 물었다.

“저도 민주란 선배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아직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당직 때 우연히 변사사건을 처리하다가 사체를 보고서야 민주란 선배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익사한 것으로 보이지만 정확한 경위는 아직 모릅니다. 지금 수사중이니까 조만간 진상이 밝혀지겠지요. 그 때까진 저도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나는 민주란의 죽음에 대해 입밖에 내고 싶지 않았지만 할 수 없이 그간의 경위에 대해 짤막하게 대답해주어야 했다.

“저는 입대하기 전날 그러니까 2학년 5월경이었을 겁니다. 북한산에서 등반을 했고, 그 때 만난 게 마지막입니다, 혹시 그 후 민주란 선배의 소식을 아시는 분이 있나요” 내가 모두를 향해 물었다.

“네가 군에 간 후로도 얼마간은 등반에도 자주 참여하고 학교공부에도 열을 올렸던 것 같다, 졸업 후에 무얼 할지 고민했던 건 기억나는데... 다른 낌새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어” 강태산이 말했다.

“그래 나도 거기까지 밖에 몰라, 연락이 끊긴 후로 민주란과 같은 과 아이들한테도 수소문해 보았지만 알 길이 없었어. 정말 감쪽같았지. 홀연히 바람에 흩어져버린 연기같았다고나 할까. 우리가 민주란과 함께 했던 날들이 신기루였다는 착각이 들어” 강충모가 흐릿한 눈가에 물기를 보이며 말했다.

“나는 얼마간 등반에 참여하다가 아버지가 ‘산의 정기를 뺏는 짓이니까 하지 말라’고 해서 그만 두었지만 그래도 민주란 선배는 많이 그리웠는데.... 그 때 잠시 배운 것들이 지금도 여러모로 많은 도움이 되고 있고.... 민주란 선배가 일러준 산을 대하는 태도랄까 자연에 대한 경외랄까, 뭐 그런 것들도 항상 뇌리를 떠나지 않아, 내가 얼치기 산꾼이지만 다른 사람들한테는 전문가처럼 행세할 수 있는 것도 그런 정신이 깃든 민주란 선배의 가르침이 몸에 배어있기 때문이었는데....” 인철이 침울하게 술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인철은 본업은 수의사이지만 지역 환경운동가로도 활동하고 있었다.

“탈레이사가르 북벽 등반중 거벽에서 1,000미터나 추락해 실종되었던 차민수라고 있지, 민주란 선배가 그 친구와 애인사이인지 아무튼 친하게 지냈다는 소문은 얼핏 들었는데 그 후론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어” 석주가 불현듯 생각난듯 말했다.

“그 때가 언제인데” 내가 새로운 사실에 정신이 번쩍 들어 물었다.

“형들이나 너희들은 졸업하고 뿔뿔이 흩어졌잖아, 등반도 거의 손을 놓았고, 호구지책이 먼저였을 테니까 이해는 해, 알다시피 나는 졸업하고도 계속 고산등반을 해왔어, 안나푸르나에서 이 모양이 되었지만, 어쨓든 그게 내가 졸업하고 2-3년쯤 되었을 때였나, 차민수라는 친구는 나와 같은 등반팀인 적은 없었지만 우리보다 2년인가 연배가 어렸을거야, 나도 합동 산악회 모임에서 몇 번 본 적이 있지만 이야기를 나누어본 적은 없고, 그 친구는 새로운 등반을 추구했지, 우리하고는 또 다른 별종이었어, 실종되었을 때도 셰르파 없이 2명만 올라가다가 함께 변을 당한 거였어, 우리 등반팀중에 차민수를 잘 아는 후배 녀석이 있었는데 그 때 그녀석이 그러더군, 어떤 여자와 사귄다고 했던가 동거한다고 했던가, 지나가던 말로 ‘남은 여자만 불쌍하게 되었군’이라고 하면서 얘기했던 것 같아, 오래되서 정확한 건 기억나지 않는데 아무튼 그 녀석이 말하는 여자는 민주란 선배가 틀림없었어, 이름은 말하지 않았지만 나이나 다니던 학교나 등반을 하던 여자였다고 했던 거나 그 외 당시 내가 판단하기로는 민주란 선배라고 확신했었던 것 같아” 석주가 말했다. 석주는 안나푸르나에서 조난당했고, 며칠 후 극적으로 구출되었지만 손가락과 발가락 11개를 절단해서 의족과 의수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몇 년간 숨어지내며 방황의 나날을 보내다가 지금의 처를 만나 다시 희망의 불을 지폈다고 하고, 이전만큼은 욕심을 낼 수 없었지만 새롭게 산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며 히말라야를 오르고 있었다.

“그 후배 이야기를 듣고, 민주란 선배한테 연락해보지는 않았어?, 그 후배와 연락이 닿을 수 있을까”내가 사건의 실마리를 풀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한 듯 직업적인 본능으로 물었다.

“당시 민주란 선배의 연락처도 몰랐고, 또 다른 급한 일들이 있어서 잊혀졌던 것 같아, 이렇게 오래 만나지 못할 거라곤 생각도 못했고, 그 후배는 한국과 티벳을 오가면서 고산 트레킹 가이드로 일하고 있는데 한번 연락해볼께” 석주가 말했다.

 

얼굴에 닿는 흙바람이 기분 좋았던 봄날 바위 틈 테라스, 풀벌레소리 요란했던 여름날 무성한 숲속, 하늘에서 뿌려지는 낙엽 몇 개를 머리에 붙이고 올랐던 가을날 쓸쓸했던 돌계단, 허리까지 차오른 눈더미를 파고 관속처럼 들어가 누워 올려다본 겨울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 우리는 한잔의 술잔 속에 함께 했던 사계를, 그곳을 누볐던 민주란을 떠올렸다. 그렇게 추억과 함께 마신 술은 눈물이 되었고, 민주란은 우리들 가슴속에서 밤새 전설이 되어 갔다.

 

 

사진출처 http://blog.naver.com/moshk2?Redirect=Log&logNo=30013612204

 

민주란의 시신은 J시의 화장장으로 옮겨졌다. 관은 용광로처럼 끓고 있는 화구로 들어갔다. 화구의 문이 닫혔고, 우리는 밖에서 기다렸다. 2시간 후쯤 민주란의 사체는 하얀 가루가 되어 나왔다. 민주란은 평소 독실한 불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산에 오르다 절에 들르게 되면 대웅전에 올라 불상 앞에서 한참 동안 절을 하고는 했다. 그 때 무엇을 빌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렇게 빨리 저승으로 가는 것은 아니었으리라. 문득 민주란이 했던 말들이 떠오른다.

“나도 죽으면 화장을 할꺼야.”

“너무 뜨겁지 않을까요” 내가 농담으로 물었다.

“불교에서 화장을 하는 이유가 있어, 사람이 죽어 깨끗한 저승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승과 그 육체를 깨끗이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화장을 하는 밑바탕에 깔려 있는 거지”

“이승에서 살았던 육체를 더러운 것으로 보고, 저승을 깨끗한 곳으로 보는 것이군요, 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하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이승이 더럽기만 한 것은 아닐텐데요, 우리가 힘들어 하는 것은 이승이 더럽고 밑바닥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꿈이 바닥나기 때문이 아닐까요”

“글쎄, 그건 절망에 빠진 백성들에게 어려워도 참고 있으면 좋은 일들이 올거라는 희망을 주기 위해 지배자들이 만들어낸 말이 아닐까, 아무튼 불교에서는 인간의 영혼이 육체에 깃들어 있는 것을 살아 있을 때로 보고, 이 기간의 영혼도 역시 더러운 것으로 본다는 거야. 따라서 육체의 모습을 없애버렸을 때 비로소 영혼이 자유로워지고 깨끗해 진다고 보는 거지, 불은 육체를 태워 형체를 없애는 수단으로 또 정화력을 가진 것으로 보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영혼을 깨끗한 것으로 재탄생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으로 보고 있는 거야” 민주란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다시 내 귓가에 메아리처럼 울려왔다.

"당신은 태우지 않아도 원래부터 착한 여자였어요" 내가 메아리에 대답해주었다. 

 

우리는 화장하여 남은 뼈가루를 들고 설악산을 향했다. 평소 그녀가 좋아하던 바위길에 한줌을 뿌렸고 남은 뼈가루는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었다. 민주란의 몸에 깃들어 있던 영혼은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육체와 함께 불에 정화되어 영원히 이승을 떠났다. 그러나 민주란이 남긴 자취는 내 속에 옮겨붙어 언제까지나 함께 살아갈 것이다. 뜨거운 한낮의 태양이 머리 위에서 이글거리고 있었다. 

Posted by lawm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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