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뜻밖의 이야기들

 

장례절차를 마치고 홍도규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안그래도 홍도규에게 물어볼 말이 많았었다. 그가 17년간 사라진(아니 우리가 몰랐던) 민주란의 과거에 대해 상당 부분 알고 있을 거란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례절차 내내 그와 이야기할 시간을 만들기가 어려웠고, 그냥 출국해버리면 어쩌나 조바심을 태우고 있던차에 마침 먼저 만나자는 연락이 온 것이다. 사무실로 오라고 하려다 검사실은 아무래도 내밀한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꺼내기엔 마땅치 않을 것 같아 그가 머물고 있는 J 호텔 방에서 만나기로 했다. 밖에선 추적추적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민주란을 처음 만나던 그날처럼.

홍도규가 알려준 J호텔 705호 객실 초인종을 누르자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문이 열렸다. 홍도규는 외출복 차림으로 트렁크에 짐을 정리해 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도 나를 만나보는 것이 출국전 마지막 일정인 것 같았다.

 

 

사진출처 http://blog.naver.com/miley97?Redirect=Log&logNo=20053986848

 

“봄비가 오는군요. 곧 여름이 올테죠. 칠레는 지금 가을이고 곧 겨울이 옵니다. 제가 고국을 떠난지도 거의 20년이 다 되어가는군요. 이렇게 한국의 봄비가 오는 것을 보니 뒤바뀐 계절만큼이나 멀리 떠나있었다는 것이 실감납니다. 공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참 멀리 갔습니다. 주란이 일만 아니었어도......” 홍도규는 슬픔이 가득찬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한채 비내리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장례식 때문에 제대로 인사도 못드려 죄송합니다.” 나는 의례적인 인사말로 대꾸했다.

“검사님, 주란이와 원래부터 잘 알고 지내셨습니까?, 저는 그냥 이번 사건의 담당 검사님인줄만 알았는데 우연히 산악회 회원들과 검사님이 이야기하는 것을 조금 들었습니다. 주란이와는 특별한 사이였던것 같은데 사실인지요? 제가 검사님을 만나자고 한 것도 그런 제 느낌 때문이기도 하구요” 홍도규가 차오르는 눈물을 누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네, 민주란 선배와 저는 같은 대학에 다녔고, 대학 산악 서클에서도 함게 활동했습니다. 저와는 한 1년간 자일파트너로 친하게 지냈구요. 그후로 저는 군에 입대했고, 민주란 선배의 소식은 통 알 수 없었습니다. 무슨 힘든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저희들과는 얼마든지 함께 할 수 있었는데.....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물론 저희들이 이런저런 핑계로 무심했던 잘못이 더 크기는 하지만요. 이렇게 비통한 상항에서 만나게 될거였으면 온세상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찾아볼 걸 하는 아쉬움이 너무나 큽니다. 때늦은 후회를 해봐야 소용없는 짓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가 민주란에 대해 원망반 자책반의 심정으로 솔직하게 말했다.

“이렇게 좋으신 친구분들이 계시니 주란이도 마지막 가는 길이 그리 외롭지만은 않았을 겁니다. 장례식에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산악회 친구들이 와주어서 저로서도 정말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혹시 민주란 선배가 그동안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알고 계신 게 있으신가요? 민주란 선배의 사인을 밝히기 위해서도 오랫 동안 저희가 몰랐던 행적은 꼭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저는 지금도 어리둥절합니다. 주란이의 사인을 밝히는데 필요하다고 하시니 제가 아는 한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무쪼록 억울한 죽음이 아니었기를 바랄 뿐입니다. 주란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주란이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졸업할 때까지 저희 집에서 함께 지냈습니다. 저도 형제라고는 주란이 어머니 밖에 없습니다. 주란이는 고아가 되다시피 했지만 저희 집에 있으면서도 항상 밝고 명랑했습니다. 어두운 구석이라고는 내색 한번 하지 않았지요. 그 어린 것이 속으로는 부모를 원망하고, 세상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오는 데도 감추려고 애쓰는 것 같아 안쓰러울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혹시 삐뚤게 나가면 어쩌나 걱정도 많았었는데 다행히 모범생으로 고등학교를 마쳤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부터는 혼자 나가 살았지요. 워낙 독립심이 강한 아이라서 저희가 만류해도 고집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어려울 땐 언제든 말하라고 했지만 학교 다니는 내내 학비 한번 손벌리지 않던 아이였습니다”

“제가 알고 있기로도 민주란 선배는 언제나 씩씩했습니다. 웃음을 잃지 않았지요. 나중에 아버지에 대한 적대감이 남아 있다는 것은 조금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더 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민주란 선배의 아버지는 아직 살아계신 것 같던데 혹시 연락이 되시나요?‘

“아닙니다. 주란이 아비도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된지 오래 되었습니다.”

“해외로 출국했다가 아직 입국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지 않은가요?”

“아 그럼, 주란이 아버지 이야기부터 먼저 해야겠군요, 저한텐 매형이 되지요. 저희 가족은 주란이가 대학교 들어가고 얼마 되지 않아 칠레로 이민을 갔습니다. 제가 의류사업을 크게 했습니다. 그런데로 부족한 거 없이 살았지요. 그러다 빚보증을 잘못 서서 부도를 맞고 풍지박산이 났습니다. 온가족이 길거리에 나안게 생겼었지요. 그 때는 자살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만 어린 새끼들이 배고프다고 보채는 것을 보니 차마 그러지도 못하겠고.... 어찌해야 될지 앞이 깜깜했습니다. 그 때 마침 저희가 다니던 천주고 신부님이 칠레 이민을 추천해주더군요. 그곳 교구에서 오래 활동하셨던 분인데, 그분 말씀이 칠레 쪽이 비자 발급받기도 쉽고, 영주권 받기도 상대적으로 쉽다고 하더라구요. 새로운 곳에 가서 다시 시작해보라고 하더군요. 두렵기도 했지만 무언가 전환점이 필요했습니다. 왜 인생에서 그런 때가 있지 않습니까. 다 잃고 혼란스러울 땐 미련없이 떠나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 집도 팔고 가게도 팔아서 대충 빚잔치를 하고 거의 무일푼으로 칠레 산티아고로 향했지요. 일단 아이들은 친정 집에 맡기고 저와 아내만 들어갔습니다. 처음에는 한국에서 의류와 악세사리를 수입해서 노점장사부터 했습니다. 당시에는 한인들도 별로 없고, 말도 안통하고 정말 너무 힘들었습니다. 왜 왔나 하는 생각도 수없이 했지요.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생각이 들면 들수록 더 악착같이 일에만 매달리게 되더군요. 한 1년쯤 지나니까 겨우 자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알게 된 한인 한명이 보증을 서주어 가게도 하나 얻고 아이들도 불러올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구요.” 홍도규는 감희어린 듯 지긋이 눈을 감았다.

“참 힘드셨겠습니다, 남미쪽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 곳이고, 당시만 해도 이민국으로는 잘 알려지지도 않았을 텐데요”

 

 

사진출처 http://blog.naver.com/hahaseyo?Redirect=Log&logNo=10095741197

 

홍도규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문득 칠레라는 미지의 나라가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비밀의 공중도시 마추픽추, 이스터섬의 불가사의한 거석상들, 남미 최고봉 아콩카쿠아산, 칠레에 대해 먼저 떠오른 것은 어딘가에서 사진으로 보았던 그런 유적들이나 자연경관이었다. 그리고 잉카의 나라였고, 스페인의 식민지였다는 것, 민중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조국이었다는 것 등이 내가 알고 있는 칠레의 단편적인 지식이었다. 조금 더 안다면 세계 최초로 선거를 통해 집권한 살바도르 아옌데 사회주의 정부가 있었고, 아옌데는 미국의 사주를 받은 피노체트의 쿠테타군이 대통령궁인 라 모네다를 폭격하는 와중에 라디오를 통해 대국민 선언을 한 다음 직접 기관총을 들고 저항하다가 장렬하게 죽었다는 것 정도이다. 아옌데가 마지막 저항직전에 라디오를 통해 했던 대국민 연설문은 대략 이런 내용이었을 것이다.

『마가야네스 라디오는 곧 끊어질 게 분명합니다. 그러면 제 차분한 목소리도 더 이상 여러분에게 닿지 않겠지요. 하지만 그건 대단치 않습니다. 여러분은 앞으로도 계속 듣게 될 테니까요. 저는 항상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겁니다. 적어도 당당한 애국자의 기억 속에 함께할 겁니다.

민중은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법이지만, 스스로를 희생하지는 마십시오. 민중은 굴종과 박해를 허용해선 안 되는 법이지만, 스스로를 자학할 필요도 없습니다.

내 조국의 노동자들이여, 저는 칠레와 칠레의 운명을 믿습니다. 반역이 지배하려고 하는 이 어둡고 가혹한 순간을 딛고 일어서 또 다른 사람들이 전진할 겁니다.

이걸 잊지 마십시오. 머지않아 위대한 길이 다시 열리고 이 길로 자유인들이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걸어갈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칠레 만세!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제 마지막 말입니다. 결국에는 제가 대역죄인과 비겁자 그리고 반역자를 심판할 도덕적 교훈이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오래전 이 연설문을 민주란과 함께 읽으면서 이념을 떠나 진정으로 용기있었던 한 사내를 위해 뜨거운 눈물을 바쳤던 기억이 눈앞에 선하다.

 

 

■ 모네다 궁전(Palacio de la Moneda)

사진출처 http://haseyo.co.kr/10095741197

 

잠시의 침묵을 깨고 홍도규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저희 가족이 모처럼 나들이를 간 적이 있었습니다. 산티아고에서 차로 하루 정도 걸리는데 아타카마라는 곳입니다. 그곳 주변의 사막이 유명하지요. 아르마스 광장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였습니다. 동양인으로 보이는 거리의 사진사가 있었습니다. 관광객들을 상대로 돈을 받고 기념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던 것이지요. 예전에는 한국에도 관광지에 사진사들이 많지 않았습니까. 거기도 그랬지요. 낯이 많이 익어서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세월의 풍파에 볼품없이 변해있긴 해도 매형인 민영태가 틀림없었습니다. 주란이의 아버지 말입니다.”

“아니 어떻게 그곳에서....?”

“때로는 영화나 소설보다 더 기구한 만남도 있는 것 같습니다. 운명적인 해후라고들 하지요. 민영태와의 만남이 꼭 그랬습니다. 사실 민영태는 저희 가족과는 원한이 많았습니다. 누님이 저세상으로 간 것도 그 사람 탓이 큽니다. 지구를 한바퀴나 돌고돌아 이국의 사막 한가운데서 다시 만나다니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웬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딱 그말이 맞더군요. 하지만 동족이라고는 우리밖에 없어서 였을까요. 함께 유배당했다는 동병상련 때문이었을까요. 이상하게도 분노보다는 반가움이 더 앞서더군요. 제가 다짜고짜 한국말로 물었죠, ‘혹시 민영태씨 아니십니까’라구요, 그러자 매형이 환청이라도 들은듯 놀라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더군요. 저희 가족을 발견하고는 표정이 굳어지더니 머리를 흔들면서 황급히 자리를 뜨려고 했습니다. 제가 달려가서 막무가내로 민영태를 붙잡았지요. 놓치면 안되겠다 싶었습니다. 팔을 잡고 ‘민영태씨 아니냐고, 매형 아니냐고, 나 홍도규라고, 당신의 아내 홍수아의 동생이라고, 몰라보겠냐고’ 저도 모르게 마구 다그쳤습니다. 민영태는 저에게서 완강하게 벗어나려다가 제 기세에 눌려 체념한듯 고개를 떨구더군요. 그렇게 민영태를 다시 만났습니다.”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민영태씨는 어떻게 그 머나먼 장소까지 흘러들어온 것인가요? 잠시 관광을 온 것은 아니었나요?”

 

“그 이야기를 하자면 깁니다. 주란이의 사인과는 별 관련이 없을 거 같지만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관련이 있을 겁니다. 꼭 들려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제 누나와 결혼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을 겁니다. 누나하고는 부모들 성화에 못이겨 맞선 한번 보고 결혼한 거라 민영태는 애초부터 애정이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 누나에게나 매형에게나 불행의 씨앗이었던 거지요. 민영태는 자신이 근무하는 고등학교 여제자와 인륜을 저버리는 짓을 하고 말았습니다. 사랑에는 국경도 없다고들 하지만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추악한 장난으로밖에 생각이 되지 않습니다. 그 나이 여학생이 선생님을 좋아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민영태가 선생이라는 직분을 망각하고 먼저 휴혹의 손길을 내뻗쳤다는 것입니다. 전해들은 이야기로는 그 여학생이 당시 어리기는 해도 거부할 수 없는 치명적인 매력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요새말로 하면 팜므파탈이었던 셈이지요. ‘두 사람이 극장에 있는 것을 보았다더라’, ‘방과후 교실에서 두사람이 껴안고 있었다러다’, ‘두 사람이 손을 잡고 호텔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더라’ 등등,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여학생 부모도 알게 되었고, 누님도 알게 되었지요. 사태의 심각성을 두 사람만 모르고 있었던 겁니다. 매형은 더 이상 교사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고, 그 여학생도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고서야 겨우 잠잠해졌습니다. 누나는 남사스러워서 차마 입에 담기조차 힘든 꼴을 당하고서도 매형 곁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바보이거나 모자란 것이라고 입방아들을 찧었지만 누님은 진정으로 매형을 좋아했었나 봅니다. 매형은 잠시 집안에 칩거하면서 반성하는 듯 하더니 결국 모아둔 돈을 몽땅 가지고, 거기다 주변 사람들한테 음악 학원을 차린다는 핑계로 돈을 빌려서는 그 여학생과 함께 외국으로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욕정에 사로잡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지요. 마지막 정착한 곳이 말레이시아라고 하는데 1년간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져간 돈으로 흥청망청 살았다고 하더군요. 가져간 돈이 바닥나니까 생활이 점점 어려워졌을 것은 뻔하구요. 외국이란 데가 그리 만만하지도 않았을테고.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어 길거리 노숙자 신세까지 떨어질 즈음 그 여학생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부모 밑에서 고생 모르고 살다가 그 어린 나이에 남자만 밑고 따라왔는데 대책없는 상황이 닥치니까 덜컥 겁이 났던 것이지요. 배고품 앞에서는 사랑도 구질구질하고 추한 그 무엇으로 변하는가 봅니다. 사랑이 아닌 것일 수도 있구요. 존경하던 선생님의 무기력한 진짜 모습을 보고 오만 정이 떨어졌을 수도 있었겠지요. 매형은 계속 남아 자리가 잡히면 여학생을 부르겠다고 했지만 그 여학생은 이미 그 때 마음이 떠났었다고 하더군요. 모진 시련 앞에서 현재에 이른 자신의 모습과 앞으로의 기나긴 삶을 그려보면서 깨달았던 것이지요. 한 사내에게 자신의 전부를 맡기기엔 스스로가 너무 젊고 아름답다는 것을 말입니다. 아, 그 여학생 이름이 양신화였을 겁니다” 홍도규는 긴 이야기에 목이 말랐던지 물한모금을 마시고는 다시 침묵했다. 밖에선 세찬 바람에 날린 빗방울들이 창문을 거세게 때리고 있었다.

 

“그럼 그 후에 민영태와 양신화는 완전히 헤어진 건가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요. 적어도 양신화 입장에서는 다시는 민영태에게 돌아가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양신화는 한국에 돌아올 때 임신중이었고, 한국에 와서야 그런 사실을 알았다고 합니다. 양신화는 임신중절을 하기에는 너무 늦어 출산을 했는데 쌍둥이 딸이었습니다. 민영태에게 알렸지만 민영태는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었습니다. 양신화가 낳은 딸들이 돌도 되기 전이었을 겁니다. 양신화의 어머니가 딸아이 하나를 데려와 누님을 만났지요. 눈물을 흘리며 딸아이를 용서해 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민영태와의 인연은 완전히 끊겠다, 양신화도 그러기로 약속했다, 나이 어린 양신화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든 상황이다, 앞길이 구만리 같은 아이를 바라보는 이 어미의 마음을 헤아려달라, 염치없는 말인줄 알지만 한 아이만 키워달라, 민영태도 자식이 있는 것을 알면 틀림없이 당신 곁으로 돌아올 것이다, 한 아이는 내가 키우겠다, 지금은 형편이 어려우니 나중에라도 데려가라면 데려가겠다, 그 때까지만 좀 맡아서 키워달라’고 했다더군요, 누님은 고민고민 하다가 남편이 곁으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아이를 키우게 된 겁니다. 그 아이가 바로 주란입니다.”

“아니 그럼 민주란 선배는 홍수아의 딸이 아니라 양신화의 딸이었다는 것인가요. 쌍둥이 형제도 있었구요?” 나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네, 그렇습니다. 원래 누나는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민영태가 딴생각을 품었던 이유중의 하나이기도 했구요. 지금이야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당시만 해도 그건 큰 약점 이었지요. 남편이 첩질을 해도 아무 말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아야 했던 것이 당시 여자들의 천형이지 않았습니까”

 

“민주란의 아버지는 돌아왔나요”

“외국에 혼자 남겨진 민영태는 그곳에서 양신화가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양신화를 데려오려면 현실적으로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민영태가 할 줄 아는 거라야 음악 밖에 더 있었겠습니까. 그것도 밥벌이에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민영태는 부두가 하역 노동자부터 공사판 날품팔이, 식당 점원 등 닥치는대로 돈을 벌었다고 하더군요. 양신화가 아이까지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물불 안가리고 덤벼들었다고 합니다. 유약하기만 했던 자신이 그렇게나 후한무치하게 돌변할 수 있다는 것에 스스로도 놀랐다고 하더군요. 3년쯤 후에는 배를 사서 참치잡이 선주로 꽤 돈을 벌었던 모양인데 양신화는 그 때까지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결국엔 누님이 자신의 딸중 한명을 키우고 있다는 것을 알고 돌아오기는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철저하게 자신의 신분을 숨겨야만 했지요”

“굳이 신분을 숨길 이유는 없었을 것 같은데, 무슨 사연이 있나 보군요?”

“네, 참치잡이 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한국 사람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상당한 돈을 빌렸던 것이지요. 민영태는 그 사람이 성공한 한국인 이민자로만 알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말레이시아 북한 대사관 직원으로 실제로는 북한 노동당 조사부 요원이었다고 합니다. 노동당 조사부는 35호실이라는 위장명칭을 사용하기도 하고 나중에 대외조사부로 명칭이 바뀌었는데 제3국에 간첩을 파견하고 해외거점을 운용하면서 해외정보를 수집하거나 해외인사를 포섭해 한국내로 우회 침투시키는 활동을 주로 하고 있습니다. 민영태의 아버지는 6.25때 북으로 강제송환된 음악가중 한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북한 노동당에서 예의 주시하고 있다가 싱카포르 공작거점에 민영태를 포섭하라는 지령을 내려보냈던 것이지요. 그 공작원은 민영태가 어려움에 처해 있는 것을 알고 접근해서는 사업자금을 빌려주었고, 어느 시점에서부터인가 민영태를 간첩으로 활용한 것이지요. 주로 동남아에 진출한 한국 기업이나 사업가들의 정보를 입수해 보고하는 것이었다고 하는데, 빠져나오려고 해도 그 때는 이미 덫에 같힌 생쥐꼴이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또 한국에 가기 위해서는 그들이 시키는대로 할 수 밖에 없었겠지요. 민영태는 그 때부터 최도식이라는 재미사업가로 위장하여 살기 시작했습니다. 북한에 들어가 정보원 교육도 받고 어느 정도 사상검증을 마친 다음 최도식이라는 이름으로 귀국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가족들도 모를 정도로 철저하게 자신의 신분을 숨겼지요. 주란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쯤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민영태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양신화에 대한 끝모를 연정을 지울 수 없었던 것입니다. 양신화는 쌍둥이 자매중 한명을 부모에게 맡기고 항공사 스튜어디스로 취업했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부모를 모두 잃게 되자 부모에게 맡겼던 한 아이를 부산의 어느 보육원에 맡겼습니다. 이제 막 자신의 꿈을 꽂피우려고 하는데 아이 때문에 피지도 못하고 시들어 버리기엔 남은 인생이 너무 아깝다고 생각한 것이겠지요. 자아가 강한 여자였다고도 볼 수 있구요. 아이를 위해 자신을 버리기엔 나이가 어렸고, 또 언젠가 성공하면 다시 데려올 생각도 했을 겁니다. 양신화는 항공사에 취직해서 주로 유럽행 노선을 탔습니다. 민영태는 한국에 들어돠 양신화를 만나기는 했는가 봅니다. 그러나 양신화의 마음을 돌이키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쌍둥이 아이의 행방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민영태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양신화를 만나기 위해 공작원의 감시를 피해 그녀가 승선하는 비행기의 도착지를 알아내어 그곳에 가 있었다더군요. 독일이었던 것 같은데, 그녀를 납치해 어디든 가서 살 생각이었다고 합니다. 민영태를 감시하던 공작원이 뒤늦게 이런 사실을 알고 추적했고, 민영태는 결국 양신화를 만나보지도 못하고 쫒기는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한국에서도 무슨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수배를 받고 있었고, 북한에서도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히게 되었지요. 남북 어느 쪽으로도 갈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누님과 저도 그 일로 안기부에서 조사를 받고 상당 기간 감시를 당해야 했지요. 참 그 때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민영태는 그 때부터 양쪽 체재의 눈을 피해 해외를 떠돌며 도망자로 살아야 했습니다. 양신화가 승선하는 비행기의 도착지에서 그녀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파리, 로마, 런던 등 유럽 전역을 떠돌며 양신화를 만날 날을 기다렸지요. 마지막에 미국 LA에서 가까스로 양신화를 만났는데, 양신화는 ‘이제 그만 놓아달라, 스튜어디스를 그만두고 곧 결혼할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을 열렬히 사랑한다, 당신은 한 때 존경하고 사랑했지만 철부지 어릴 때의 일로 지금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한 아이는 부산 보육원에 맡겼다, 나는 호적상 아직 처녀로 되어 있으니 아이를 데려올 수는 없고 당신에게 부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민영태도 양신화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고, 쫒기는 신세로 국제미아가 되어 희망없는 삶을 살다가 페루까지 들어왔던 겁니다. 세월이 흘러 감시의 눈도 무뎌지기도 했고, 페루에서 겨우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페루에서 사진사 보조로 따라다니다 사진 기술을 익혀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구요.” 홍도규는 이야기가 깊어 갈수록 점점 더 놀라운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사진출처 http://blog.naver.com/idprogram?Redirect=Log&logNo=70164542

 

“혹시 민주란 선배의 쌍둥이 형제는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민영태가 양신화로부터 버림받고서도 살아있는 이유는 죽기 전에 두 아이를 만나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했으니까 민영태는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저희한테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죽기 전에 주란이한테는 말했을 수도 있구요.”

“혹시 이름이 민영주가 아닌가요”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민주란 선배는 끝까지 아버지의 그런 비밀을 몰랐나요.”

“어머니가 마지막에 유언처럼 이야기해주었다고 합니다. 어렸을 적에는 ‘외국에 돈벌러 나가셨다, 곧 돌아오실 거다’라고 했고, 그 시간들이 점점 길어지고, 주란이도 머리가 커서 어느 정도 눈치를 챘을 시점에 어머니가 마지막 눈을 감으면서 말해주었다고 하더군요. 그렇지만 쌍둥이 형제나 출생의 비밀은 끝내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구요”

“민주란 선배는 쌍둥이 동생이 있다는 것을 몰랐군요, 아버지를 만나지는 못했나요.”

“아타카마에서 민영태를 만난 후로 저희 가족과는 왕래가 있었습니다. 가끔씩 만나 식사도 하고, 안부전화도 했습니다. 민영태로서는 딸들의 소식이 궁금했기 때문에 저희와 단절하기도 어려웠지요. 그러다가 저희 가게 옆에 사진관을 하나 차려주었습니다. 그 때 민영태는 이민 2세대로 위장하여 까를로스라는 이름으로 살았구요. 민영태는 파긴슨 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는데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는지 주란이를 꼭 한번만 만나보고 싶다고 하더군요, 경위야 어떻든 두사람은 천륜으로 맺어진 사람들이고, 같은 남자로서 애처롭기도 했습니다. 반평생을 떠돌며 살았던 그에게 마지막 소원일지도 모르는데 왜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란이에게 연락해서 칠레에 들어오라고 했던 것입니다”

“민주란이 칠레로 들어왔나요?”

“네, 졸업반 여름 방학 무렵인가 왔었습니다. 여기는 겨울이었구요. 아버지와 극적으로 해후하게 되었는데 아버지는 이미 초로의 노인이 되어 있었고, 살 날도 그리 길지 않아 보였습니다. 두 사람이 어떻게 화해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주란이는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았고, 한해 두해 세월이 갔습니다. 한국에 가서 졸업하고 다시 오라고 해도 ‘그깟 졸업이 무슨 대수냐’면서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외면한다고 해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도 없겠건만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를 극진히 돌보았습니다. 사진관은 주란이가 거의 도맡아 운영하기 시작했구요. 민영태는 주란이가 온지 3년이 지나 시름시름 앓다가 운명했습니다. 그 후로도 주란이는 사진관을 운영하면서 지냈습니다”

“민주란은 누군가와 사귀었다고 하던데 혹시 아시나요”

“한국에서 안데스 산맥 쪽으로 해외 원정팀이 한번 왔던 적이 있습니다. 그 친구들이 우연히 사진을 인화하러 왔다가 주란이와 알게 되었는데 그 중 한사람과 어떻게 친해졌는지 편지를 주고받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친구가 이쪽으로 등반을 하러오면 함께 산행을 한 것도 같구요, 제가 아는 건 여기까지 입니다”

“혹시 그 친구가 장민수가 아닌가요”

“글쎄요, 이름은 잘 모르겠습니다”

“민주란 선배는 계속 칠례에 남아 있었나요”

“그렇게 몇 년 더 있다가 어느날 갑자기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더군요. 구체적인 이야긴 하지 않았고, 언젠가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떠났습니다. 한국에 돌아가 가끔 잘 지낸다는 안부편지도 보내오고, 선물도 보내오고 해서 별 걱정없이 지냈는데 이번에 이런 일을 당한 것입니다.”

 

홍도규를 만나고 나서 호텔 밖으로 나오자 비개인 하늘에 노을이 지고 있었다. 관사로 돌아와 홍도규의 말을 다시 한번 곱씹어 정리해보았지만 민주란의 죽음과 직접적으로 연관지을 수 있는 내용은 없었다. 그러나 민영태, 양신화, 홍수아, 민주란, 그녀의 쌍둥이 형제의 기구한 운명이 가슴 속을 파고 들면서 비밀의 문이 조금씩 열리고 있다는 예감이 밀려들었고, 장민수의 등반친구이고 석주의 후배라는 인물을 빨리 만나봐야 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홍도규는 다음날 비행기편으로 칠레로 떠났다.

Posted by lawm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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