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도규가 떠나고 난 그 주의 주말이었다. 석주의 후배이고, 장민수를 잘 알고 있다는 천주일이 히말라야 트레킹 일정을 마치고 입국했다고 하여 서울에서 만나기로 했다. 토요일 오전근무를 마치자마자 기차역으로 향했다. J역 플랫폼은 단체로 또는 삼삼오오 짝을 지어 몰려온 청년들로 북적거렸다.

 

문득 주변이 흑백영상으로 오버랩되면서 스쳐가던 청년들은 오래전 낯익은 얼굴들로 바뀌어 있다. 시끌벅쩍하던 소음도 갑자기 사라지고 어딘가에서 들었던 목소리들이 메아리를 일으키며 울려온다. 흥겨운 한 떼의 무리들 틈에서 민주란이 활짝 웃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단 한곳만 빛이 비추고 그 빛속에 그녀가 들어있다. 햇살이 남은 힘을 모두 모아 그곳에만 내려쪼이고 있다. 나머지 세상은 온통 어두움이다. 내가 손을 흔들자 그녀가 빛과 함께 힘차게 달려와 품속에 들어온다. 감미로운 온기가 몸을 데우는가 싶더니 스스르 빠져나가고 없다. 다시 낯선 청년들이 밀려들어 발빠르게 내 곁을 지나간다.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우두커니 서서 이방인처럼 머쓱거리고 있다. 사방을 휘둘러 보았지만 눈길 닿는 곳 어디에도 민주란은 없었다. 언젠가 그녀와 함께 있었던 어느 간이역전에 다시 온 듯한 몽환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무거운 세월의 두께를 뚫고 고개를 내민 생생한 찰라의 영상에 놀라며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민주란은 여전히 언제 어디에나 그렇게 존재하고 있었다.

 

종착지인 서울역 근처 대포집에서 천주일을 만났다. 석주도 함께였다. 천주일은 입국하자마자 이리로 온듯 덥수룩한 머리에 수염도 깍지 않은 모습이었고, 검게 그을린 얼굴에 눈동자만 빛나고 있었다.

“여독도 풀지 못했을텐데 급히 보자고 해서 죄송합니다.”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닙니다. 저야 어디에 묶인 몸도 아니고 늘 자유롭게 살고 있는데요, 뭘. 다음 일정때까진 한달 정도 있어야 하니까 그 때까진 푹 쉴 수 있습니다. 오히려 검사님이 주말에도 업무 때문에 서울까지 오시느라 힘드시겠습니다, 불러주시면 제가 찾아뵐 수도 있었는데.... ” 천주일이 사나이다룬 말투로 호탕하게 대답했다. 나는 천주일의 그런 태도에 광활한 히말라야 어느 산자락에 와 있는 듯 팽팽한 긴장의 끈을 잠시 놓을 수 있었다.

 

우리는 돼지껍데기를 안주 시켜 막걸리잔을 돌렸다.

“석주 선배로부터 장민수에 관해 알아보실 게 있다는 말은 들었습니다만, 제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천주일이 목이 말랐던지 사발에 담긴 막걸리를 한번에 들이키며 운을 뗏다.

“아직 자세히는 말하지 못했어, 나도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서 민주란 선배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어. 네가 직접 말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내가 천주일에게 어디서부터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야할지 도움을 주려는 듯 석주가 말했다.

 

“저희 관내에서 변사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알고 보니 민주란이라는 여자인데 저희와는 같은 대학 산악회 선배였습니다. 물론 우리 모두 친형제처럼 아주 가까운 사이였구요. 그런데 민주란 선배는 그녀가 대학 4학년 말경부터 저희와는 연락이 끊겼습니다. 민주란의 외삼촌한테 들은 이야기로는 민주란이 칠레에 가서 살았고 그 때 알고 지내던 한국 남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석주도 천주일씨로부터 장민수가 어떤 여자와 사귀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 여자가 민주란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민주란이 칠레에서 한국에 다시 들어온 때가 장민수가 실종된 무렵같구요. 한국에 들어온 이후의 행적은 아직 드러난 것이 없어서 장민수와의 관계를 풀어보면 혹시 단서가 될만한 사실이 나올 것도 같아서 이렇게 천주일씨를 만나자고 한 겁니다. 천주일씨는 장민수와는 등반친구이고, 장민수에 대해서는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만....“ 내가 천주일을 만나자고 한 경위와 이유에 대해 대략적으로 설명했다.

“민수가 실종된 건 벌써 5년 전이고, 민주란이라는 여자가 사망한 것은 최근 같은데 그녀가 민수와 사귀던 여자라고 하더라도 그녀의 죽음과 민수와의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천주일이 장민수의 실종을 다시 떠올리기 싫은 내색을 보이며 내게 물었다.

 

“장민수의 실종과 민주란 선배의 죽임이 직접적인 관련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일정부분 밝혀지긴 했지만 아직도 민주란 선배의 과거 행적이 저희들에게는 베일에 가려져 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래서 한 때 저희와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사람이 어디에서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해 알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개인적인 치부를 드러내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또 수사하는 입장에서 보면 모든 결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게 마련이고, 특히 이번 사건의 경우 단순한 사고라고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습니다. 그런 의문을 푸는 것이 저희들의 의무이고 망자를 위해 마지막으로 반드시 해야할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래전 일이기는 하더라도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파악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장민수의 과거를 다시 떠올리는 것이 친구의 입장에서 곤혹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장민수씨를 위해서도 말씀해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장민수씨가 사랑하던 여인이었다면 그도 민주란의 죽음이 억울하게 묻히는 것을 바라지는 않을 것 아니겠습니까?” 나는 천주일이 죽은 친구에 대해 다시 왈가왈부하는 것에 대해 죄의식을 갖고 있는 것 같아 편안하게 말할 수 있도록 하려고 이런저런 설명을 덧붙여야 했다.

 

“네, 검사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알고 있는 한 모두 말씀드리도록 하지요. 그러니까 민수가 사고를 당하기 전에 알고 있던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전까지 민수는 산에만 열중하고 있었지 연애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 여자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민수도 딱히 구체적인 이름은 말하지 않았던 것 같구요. ‘매서운 칼바람에 마지막 체온을 빼앗기기전 불어온 훈풍같은 여자’라고 하거나 ‘황량한 들판 위에서 발견한 생명꽃’이라고 하는 등 추상적으로만 그 여자를 지칭했습니다. 민수가 남미 아콩가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페루 산티아고에서 하루 밤을 묶게 되었는데 우연히 사진관에 들렀다가 거기서 그 여자를 만났다고 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 뜬금없이 제게 말하더군요. ‘나 말이야, 내 청춘을 산에 바치기로 했었는데 마음이 바뀌었어’라구요. 제가 ‘무슨 소리야, 이제 산에는 더 볼게 없어서 하산하겠다는 거야, 누가 산에서 내려오라고 잡아끌기라도 했어?’라고 물었지요. 민수는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 운명이 나를 불러, 어서 오라고, 청춘이 아니라 내 생의 전부를 들어다 바쳐야 할 것 같아, 미래뿐 아니라 과거까지도 모두’라고 답하더군요. ‘운명은 뭐고, 어서오라는 건 또 뭐야, 선문답은 그만 하고 속시원히 말해봐라, 우리 사이에 못할 이야기가 뭐있냐?’라고 물었지요. 그러자 그제서야 그 여자를 만난 이야기를 해주더군요. 민수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눈빛이 마주치자 정수리에서부터 발가락 끝까지 마른 번개가 훑고 지나가는 것 같더라는군요. 두려움같기도 하고 깨달음 같기도 한 딱히 무어라고 단정할 수 없는 기이한 순간이었다고 합니다. 그 후 불쑥불쑥 그 느낌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 중심엔 항상 그 여자가 있더랍니다. 뭐, 남자들이 이성을 보면 첫눈에 반할 수 있고, 알고보면 대부분 욕정을 스스로 미화한 것이어서 쉽게 식어버리거나 사랑이라는 가면으로 탐욕을 가리고 있는 것이어서 추잡하게 끝나기 마련이지만 제가 보기에도 민수에게 찾아온 건 정말 특별한 감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도 민수의 혼을 송두리째 빼앗은 여자가 어떤 여자일지 궁금했지만 직접 대한 적은 없고 민수가 보여준 그림이나 사진으로만 보았습니다.” 천주일은 그리운 친구를 떠올리며 감상에 젖어 말하고 있었다. 장민수가 천주일의 입을 빌려 말하고 있는 것도 같았다.

 

“그럼 이 여자가 맞습니까” 내가 보관해온 17년전 민주란의 사진을 꺼내 보여주며 물었다. 여러 사람의 이야기로 미루어 장민수가 칠레에서 만났던 여자가 민주란임이 틀림없어 보였고, 천주일을 추궁하는 것 같아 망설였지만 한치의 틈도 없도록 하려는 검사로서의 직업적 습관을 버릴 수는 없었다.

“글쎄요, 오래되긴 했지만 맞는 것 같습니다”

 

“장민수는 어떤 친구였나요.?” 천주일이 들려준 장민수와 민주란의 첫만남은, 그 때 장민수의 민주란을 향한 마음은 사랑을 뛰어넘어 숭배에 가까웠으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장민수의 고귀한 마음에 흠집이라도 내고 싶었던 것일까. 그가 나의 연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앞에 질투심이 고개를 내민 때문이었을까. 죽은 자를 두고 이 무슨 뚱딴지같은 유치함인가. 사사로운 감정이 발동하여 먼저 장민수에 대해 알고 싶어 내가 물었다.

 

"산악인들 사이에서도 좀 별난 친구였습니다. 저랑은 K대 산악회 동기이기도 하구요. 경영학을 전공했지만 학업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인수봉이나 구곡폭포를 프리솔로로 오르지 않나, 안나푸르나 정상에서 행글라이더를 타고 내려오지 않나 정말 대단한 친구였습니다. 다들 미친 놈이라고 했지요. 그래서 대다수 정통 산악인들과는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연맹이니 연합이니 하는 산악회에 소속되어 있지도 않았고, 어떤 조직에 얽매이는 것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대규모 원정에는 절대 끼지 않았습니다. 끼이고 싶어도 상대편에서 받아주지 않았겠지만 말입니다. 군대 조직처럼 팀을 만들고 이런저런 역할을 맡아 원정길에 오르는 것을 도무지 못마땅해했고, 비웃기까지 했지요. 혼자 다니고, 혼자 사색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암벽, 빙벽도 혼자 오르는 법을 스스로 터득했구요. 그가 이런 말을 한 것이 기억나는군요. ‘산들이 매순간 보여주는 온갖 즐거움을 하나라도 거절해서는 안 된다. 눈이 오거나 비가 오거나 어떠한 악천후도, 한낮이든 한밤중이던 하루의 어느 때도 그것이 무엇이든 제한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굶주림과 목마름, 길없는 캄캄한 숲속이나 천애의 절벽 앞에서의 두려움 조차도 축복이 아닐까. 왜냐하면 외부적이든 내부적이든 산에서 만나는 예측할 수 없는 모든 변화 또한 산의 일부이고 나는 산의 일부가 되었을 때 가장 행복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산에 맞서거나 피하기 보다는 산이 품고 있는 모든 것에 순응한다는 뜻이겠지요. 장민수의 그런 태도는 오만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자신을 가장 낮추는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언제든 산에서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하고는 했습니다. 그 여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지요“ 천주일은 장민수가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해 가장 핵심적인 그의 말을 통해 알려주었다.

 

“그가 한 행위는 목숨을 하찮게 여긴다는 비난도 받았지만 어찌보면 우리한테도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어. 아무도 가지 않는 미지의 땅을 간다는 도전정신이라는 미명하에 어떻게 하면 기업으로부터 협찬을 받을까 경쟁하고, 또 그런 경쟁 때문에 무리한 등정을 시도하는 대부분의 산악인들 쪽에서 보면 장민수의 순수성은 자신들의 불편한 진실을 까발리는 것이었을테지. 장민수는 그네들에게 정말 도전정신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성취하는 방법이 잘못되었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강조한 거라고 생각해, 적어도 산에 있어서는 말이야” 석주가 옆에서 거들며 한마디 했다.

 

장민수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조직의 힘에 의해, 장구한 세월동안 켜켜이 쌓인 강고함에 의해 빠져나갈 수 없이 촘촘하게 짜여진 낡은 의식의 그물망에서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쳤던 자유로운 영혼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는 나와 비슷한(물론 나는 상상속으로만 그러했고, 행동으로 보여준 장민수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았다. 좀 더 일찍 만났더라면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아니면 치열한 연적이 되었을 수도..... 그런 사내라면 민주란이 가까이 하였다고 하여 전혀 불쾌할 것도 없으리라. 잠시 고개를 내밀었던 질투심 조차 부끄러워졌고, 천주일과 석주가 그것을 본 것 같아 낯이 화끈거렸다.

 

“장민수는 민주란과 어떻게 가까워졌나요. 한국과 칠레는 굉징히 먼 거리인데, 두 사람이 어느 정도 가까운 사이였는지도 궁금하군요?“ 내가 화제를 돌려 물었다.

“처음엔 편지나 전화로 연락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민수가 등반을 핑계로 1년에 몇차례씩 칠레로 떠났습니다. 처음엔 민수의 열렬한 구애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민수는 그 여자도 산에 관심이 많았던 것을 알고는 혼자 여러 차례 칠레에 가서 가이드를 핑계로 동반산행을 부탁했던 것 같습니다. 자주는 아니지만 산을 통해서 두 사람은 가까워졌다고 하더군요. 어느 정도 가까운 사이였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장민수는 흔히들 남자들이 무용담처럼 말하고는 하는 여자와의 육체관계나 뭐 그런 것들은 언급한 적이 없었으니까요. 아무튼 안데스 산맥 어느 계곡에서 둘이 빙벽등반을 한 적이 있었는데 민수가 하강할 때 발을 잘못 뒤뎌 넘어지면서 그녀를 끌어안는 모양이 되어 버렸답니다. 당황해서 민수로부터 빠져나가려는 그녀를 힘껏 안으면서 귀에다 ‘우리 같이 살자’고 했다더군요. 오랫동안 준비하고 있었지만 머뭇거리고만 있던 차에 그렇게 불쑥 프로포즈를 한 것입니다. 그 때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민수의 품에 자신을 맡긴채 가만히 있었다고 합니다. 민수는 탈레이사가를 마지막으로 칠레에 들어가 살 생각이었다고 한 것을 보면 그 여자도 그 때 민수의 프러포즈를 받아들인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또 민수가 탈레이사가르로 간다고 했을 때 그 여자는 예감이 좋지 않다며 이번에는 가지 않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민수는 고민을 많이 했었습니다만 결국 탈레이사가르 등반을 포기하지 않았고, 공교롭게도 그녀의 예감이 적중했던 것입니다.” 천주일이 둘 사이의 관계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이야기해 주었다.

 

 

사진출처 http://blog.naver.com/viva1143?Redirect=Log&logNo=100140326015

 

“장민수는 어떤 일을 했습니까” 내가 다시 물었다.

“민수가 경영학과에 들어온 것도 아버지의 강요에 의해서 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민수는 문학이나 미술 쪽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실제 그림이나 조각 솜씨는 수준급이었구요. 민수가 그 여자를 모델로 한 그림이나 조각상을 많이 만들었는데 모두 그가 떠날 때 함께 묻어주었습니다. 졸업하고도 취직은 하지 않았습니다. 민수는 집안이 상당히 부유했습니다만 집에서 도움을 받지는 않았고, 대학로에서 초상화를 그려주거나 선배가 운영하는 클라이밍 센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활을 유지했습니다. 아마 잘 아실텐데 봉황그룹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군장성 출신인데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민수가 아무 대책없이 함부로 살고 있는 것으로 비쳐졌겠지요. 아버지가 산에 다니는 것은 좋은데 졸업하고도 계속 미친 짓거리를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고함을 치기에 그 때부터 집을 나와 살았다고 합니다. 그 후 아버지와는 거의 의절했다시피 했다고 하구요. 저도 한참 동안 몰랐는데 저와 많이 가까워진 후에야 아버지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신군부의 핵심으로 민수는 그런 아버지의 이력도 감당하기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민수는 세상과 더 어울리지 못했는지도 모르겠구요.” 천주일이 민수의 가정사에 대해서도 대략 이야기해주었다.

 

“봉황그룹이라면 회장이 장학모 아닌가요.”

“네, 맞습니다”

장학모. 그렇다. 어릴 적 겨울 논바닥에 내려앉은 헬리콥터에서 내렸던 번쩍이는 별 두 개가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 장학모는 신군부가 쿠테타에 성공하여 정권을 잡은 후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요직을 거쳤다. 그 후 모 기업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장학모가 전리품 비슷하게 건설부분의 경영권을 탈취하여 기업가로 변신하였고, 군사정권 하에서의 온갖 혜택을 누리며 공격적인 기업인수합병을 통해 국내에서 손가락안에 드는 재벌로 성장해 있었다. 고향에서 간간히 들었던 장학모의 소식은 대강 그러했고, 나는 남의 일처럼 흘려들었었다. 그런데 장민수가 장학모의 아들이었다니, 그리고 민주란이 그와 관련이 되어 있다니 세상은 정말 요지경이었다.

 

“민주란은 장민수의 실종 사실을 알고 있었나요?“ 장민수가 장학모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잠시 멍해 있던 내가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네, 제가 장민수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연락처가 있기에 알렸습니다. 처음에는 믿지 못하더군요. 그럴 리가 없다고 하면서 놀라는 기색이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연락할 때까지 한국언론을 접하지 못했던 것 같았습니다.”

“민주란이 한국에 들어오지는 않았나요?”

“글쌔요, 제 연락처를 남기기는 했습니다만, 한국에 들어왔다면 한번쯤 연락했을 것도 같은데 연락이 없던 것으로 보아 한국에는 오지 않은 것 같습니다. 결혼한 사이도 아니니까 민수가 죽었다고 해도 괜히 엮이고 싶지 않아서 외면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무척 섭섭하기도 했구요. 아니면 뭐 그럴 일은 없었겠지만 별 사이도 아닌데 민수가 민주란과의 관계를 과장되게 이야기하였거나”

 

장민수는 민주란을 열렬히 사랑했고, 프러포즈까지 했다. 민주란도 장민수를 반려자로 받아들였는지는 아직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두 사람이 상당히 친밀한 사이로 만나왔던 것만은 분명했다. 민주란은 장민수의 실종 소식을 듣고 입국한 것일까. 홍도규의 말처럼 민주란이 어느날 갑자기 한국으로 떠났다는 것과 장민수의 실종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 것일까. 그 시기가 대체로 비슷한 것으로 보아 민주란은 장민수가 실종된 것을 알고 나서 입국한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장민수는 장학모의 아들이었고. 그날 내가 파악한 것은 거기까지였고, 아무 것도 명쾌하게 매듭이 풀리지는 못했다.

 

우리는 3명이서 막걸리 20통을 비웠지만 나는 전혀 취하지 않은채 오히려 정신이 점점 말똥말똥해진 상태로 그네들과 헤어졌고, 마지막 기차에 올라 J시로 내려왔다. 별빛이 나부끼는 기차길옆 창밖 풍경은 언제나처럼 고요했다. 인간사 모진 풍파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것처럼. 이제 남은 것은 민주란이 한국에 입국한 후의 행적을 밝히는 것이다. 

Posted by lawm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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