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바다여 말해다오, 내가 누구인지를

(민영주의 비망록)

 

홍반장이 의혹을 제기한대로 일기장은 민영주가 기록해놓은 것이었다. 날짜와 날씨를 적고 그날그날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서술하거나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여과없이 풀어놓기도 했다. 누군가로부터 받은 편지와 먹지를 대고 2부를 작성하여 1부는 보내고 남은 1부는 보관하고 있는 듯한 답장편지도 끼어있었다. 여기서는 중요 부분만 요약해서 다시 정리해보고자 한다. 되도록이면 적혀진 표현 그대로 옮기려고 하였으나 편의상 사투리를 표준어로 바꾸고 장황한 내용을 압축하는 과정에서 본래의 뜻이 왜곡되었다면 저자의 무능 탓이므로 양해있으시기 바란다.

 

 1. 쌍둥이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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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별 보육원은 해운대 앞바다가 훤히 바라보이는 높다란 언덕에 자리하고 있었다. 보육원은 6.25때 피난민들이 몰려들었을 때 가건물로 지어졌다가 아이들의 노동력까지 동원되어 현재의 번듯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200여평 규모의 대지 위에 2층짜리 건물이 두개 있는데, 하나는 아이들의 생활공간으로 쓰여졌고, 다른 하나는 예배당과 그에 딸린 신부님, 수녀님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곳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보육원은 성당에 부속된 복지시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주변으로는 보육원이 처음 지어질 무렵 피난민들이 얼기설기 마구 지은 집들을 조금씩 개량한 주택들로 한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봄날 멀리서 바라보면 야생 해당화, 동백, 매화가 무질서하게 꽃을 피워 산자락을 뒤덮고 있어 얼마전까지만 해도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던 천여지였음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성냥갑같은 집들 100여채가 벼랑 끝까지 촘촘이 들어서 있었고, 그 꼭대기에 예배당의 십자가로 만든 첨탑이 보였다. 언젠가부터 마을은 개발의 붐을 타고 전망좋은 곳엔 낡은 집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으리으리한 저택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중이었다.

 

보육원 현관 문을 나서면 낮은 울타리가 쳐진 앞마당이 있고, 마당 중앙엔 죽은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마리아 상이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울타리가 없는 반대편은 거의 90도에 가까운 절벽이고, 남빛 바다가 가없이 펼쳐져 있다. 바다는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는 듯 거대한 파도를 만들어 쉬지 않고 절벽의 아랫부분을 힘차게 부딪고 있다. 그 요란한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높다란 언덕 전체가 어딘가로 떠밀려 가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보육원엔 한때 수백명의 아이들이 넘쳐났으나 전쟁고아들이 장성하여 뿔뿔이 떠나면서 이제는 부모의 사망으로 또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가족들에게서 버림받은 아이들만 50여명 가량 모여 생활하고 있었다.

영주는 방안 창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갈매기 소리를 들으며 잠자리에 들었고, 수평선 위를 물들이는 엷은 햇살이 얼굴을 간지르면 눈을 떴다. 매일 바다와 함께 하루를 시작했고, 하루를 마쳤다. 아이들은 무리지어 시내의 학교에 몰려다녔지만 영주는 늘 홀로 학교를 오갔다. 부끄러워서라기 보다는 그런 집단적인 행동이 다른 아이들에게 거부감을 준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어느 학생의 물건이 없어지면 보육원 아이들을 가장 먼저 의심하고, 성적이 나쁜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도 어쩌다 뛰어난 성취를 보이는 아이에겐 칭찬보다는 시기와 질시를 먼저 날려보내는 것은 그런대로 참을 수 있었다.

 

그런데 영주가 친구의 생일잔치에 초대되어 갔을 때 그 친구 엄마가 친구를 조용히 불러 “고아원 애들은 사귀지 말라고 했잖아, 저런 애를 데려오면 어떻게”라고 하면서 핀잔을 주는 것을 엳들은 후부터는 이마에 주홍글씨라도 새겨져 있는 것처럼 사람들 대하기가 영 찜찜했다. 영주는 세상과는 점점 벽을 쌓고 혼자가 되어 갔다.

 

그렇지만 영주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이 자신의 아버지였고, 어머니였기에 세속의 혈연은 티끌만큼도 안되는 구차한 인연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분명 하느님의 자식으로 크게 쓰일 날이 있으리라 믿었고, 범사에 감사해했다.

 

영주는 이제 중학교 3학년이 되어 있었다. 영주는 요즘들어 양지바른 바위 풀섶에 혼자 숨어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는 날들이 많아졌다. 외로울 때 위로해주는 것도 바다였고, 기쁠 때 웃어주는 것도 바다였다. 바다만이 영주의 마음을 미리 알아채고 친구가 되어 주었다.

 

방과후 보육원을 오르다 작은 집 쪽방 전등불 밑에 온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저녁상을 기다리고, 그 집 어머니가 부뚜막에서 저녁을 짓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따뜻한 온기가 전해왔다. 이전에는 그 또한 자신의 일부로 여겼고, 함께 다뜻해 했었다. 그런데 이즈음엔 그것은 남의 행복일 뿐이며 자신에게는 이전은 물론 앞으로도 저런 작은 행복조차 가져보지 못할 것이란 절망이 서늘하게 밀려들었다.

 

‘주여 왜 이 빈들에 저를 세우셨나이까’ 영주는 기도하고 또 기도했지만 아무도 그 답을 주지 않았다. 

Posted by lawm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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