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길 잃은 젊은 날들

 
1. 등반

두런거리는 소음과 손바닥만한 창문으로 한줄기 햇살이 얼굴을 비추면서 눈을 떴다. 자취방엔 덩그마니 혼자 누워 있다. 창에 바로 붙은 골목길에서는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의 발소리로 소란스럽다. “뿌우, 뿌우∼” 나른한 하품을 하듯 근처 간이 역전에서 출발을 알리는 중앙선 비둘기호 기차 소리가 들려온다.

함께 자취하는 동규는 벌써 출근한 모양이다. 동규는 고향에서 농고를 중퇴하고 무작정 상경하여 농수산물 시장에서 일하고 있다. 사실은 중퇴가 아니라 교내에서 담배를 피우다 학생주임한테 들켜서 정학을 맞은 것이다. 집에서 빈둥대다가 부모로부터 “이 문디 자슥아, 그럴꺼면 학교고 뭐고 일찌감치 때려치우고 돈이나 벌어라 마”라는 욕설 비슷한 말을 듣고는 울화가 치밀어 그 길로 짐을 싼 거라고 했다.

화물차에 실려온 전국의 농수산물이 창고에 부려지면 각 도매상으로 배달하는 일을 하고 있다. 처음엔 무허가 직업소개소를 통해 이상한 술집에 취직하여 삐끼 노릇을 했다고 한다. 취객들을 데려오면 아가씨들이 마구 술을 먹인 다음 터무니없는 술값을 요구하고, 손님들이 항의하면 마지막에 건장한 깡패들이 험상궃은 얼굴로 등장하여 주머니를 거의 거덜내다시피해서 쫒아내는 것을 몇 번 보고는 환멸을 느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고 한다.

지금 하는 일이 몸은 고되고, 돈도 얼마 되지 않지만 마음은 그리 편할 수가 없고, 농사일에 단련되어 그런지 육체노동이 적성에 맞는다고 했다. 술과 담배도 끊고 오직 돈만 벌거라고 했다. 돈을 모아 도매상 하나를 낼 것이고, 더 많은 돈을 벌어서는 유통업계를 손에 쥘 것이고, 진짜 많은 돈이 모이면 학교를 하나 세울 거라고, 눈을 반짝이며 원대한 포부를 내비치고는 했다. 확실한 인생의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향해 쉼없이 나아가는 그가 존경스럽기도 했다.

입학전 고향에 들른 동규를 만났고, 동규는 이야기 끝에 누추하지만 자신이 자취하는 방에서 함께 지내자고 했다. “타향에서 살아보니 외롭고 서러울 때가 많더라, 친구끼리 서로 의지하면 좋지 않겠느냐”고 했다. 보증금 30만원에 월세 7만원짜리 방에서 자취를 하고 있는데 보증금을 내지 않는 대신 월 4만원만 내고 함께 지내면 서로 절약도 되지 않겠느냐고 하였다. ‘월세를 아끼기 위해 나을 이용하려는 것이 아닌가’ 잠깐 의심하기도 했지만 마땅히 거처할 곳을 구하지 못하고 있던 나는 동규의 제안을 받아 들였고, 그와 함께 지내고 있다.

눈은 떴지만 몸이 무겁다. 가만히 누워 상황을 정리해본다. 새벽까지 술을 마셨던 기억이 나고, 겨우겨우 자취방까지 찾아들었던 것 같다. 골목 초입에서 옆방 아가씨를 만났고, 무슨 이야기인가를 했던 것 같다. 아마도 내가 “늦으셨습니다”라고 아는체를 했고, 아가씨는 전혀 경계하는 빛도 없이 “네, 학생분도 늦으셨군요”라고 했던 것 같다. 아가씨에게 이름을 물었고, 고향을 물었고, 그랬던 것 같다. 혹시 술기운에 추근거리지는 않았나?, 그건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아가씨가 먼저 들어가고 나는 골목에 멍하니 앉아 새벽 풍경을 구경하다가 들어와 골아떯어졌던 것 같다.

옆방에는 우리 또래의 아가씨와 청년이 동거하고 있었는데, 아가씨는 화장을 짙게 하고, 곱게 단장한 차림으로 저녁 무렵 출근하는 것으로 보아 술집이나 그 비슷한 곳에 다니는 것 같았고, 청년은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아가씨가 벌어오는 돈으로 기생하면서 낮에는 하루 종일 자빠져 자다가 아가씨가 없는 밤에는 술집이나 노름판을 기웃거리는 것 같았다. 가끔씩 아가씨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오고, 가재도구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두들겨패는 소리가 들리다가도 이내 웃음소리가 들려오고는 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한쌍이었다. 처음엔 놀라 문앞에서 “무슨일 있으십니까”라고 소리쳐 보았지만 아가씨가 방문을 열고는 “아무 일도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라는 답이 들려오고 부터는 우리도 옆방이 아무리 소란스러워도 개의치 않게 되었다.

또 그 옆방에는 방 2개를 사용하는 젊은 부부가 살고 있다. 남자는 버스기사였고, 여자는 식당에서 일한다고 했다. 낮에는 초등학교 다니는 남자 아이가 엄마가 돌아올 때가지 혼자 집을 지켰다. 남자는 여자와 아들이 없는 밤이면 함께 근무하는 버스안내양을 바꾸어가며 집으로 데려와 날이 샐 때까지 킥킥거리고는 했다.

묵직한 머리를 들어올려 자리에 앉자 오늘 첫 산행이 있다는 것을 가까스로 기억해냈다. 북한산으로 올라가는 초입 우이동 버스종점에서 만나기로 했었지. 전날의 숙취로 빈속에 몽롱산 상태였지만 신입생 환영회장에서 들었던 노랫소리가 귓가에 쟁쟁하다. 오늘 그 여인을 볼 수 있을까. 산악회 회원인지 아니면 누가 데려온 애인인지 아직 정확히 파악되지 않은 상태다. 곧바로 등산장비를 배낭에 챙겨넣는다. 카라비너, 퀵드로 몇개씩과 8자 하강기, 하네스(안전벨트) 등속이다. 선배가 쓰다가 자신은 새것이 생겨 넘겨준 것으로 누군가 해외 등반을 나갔다가 사온 것인데 몇 대를 거쳐 선배에서 후배에게로 전해내려오는 거라고 했다. 장비는 바위에 끌려 도금칠이 여기저기 벗겨져 있고, 하네스는 떼에 절고 알아볼 수 없게 이름을 새긴 흔적만 남아 오랜 등반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선배는 장비를 내게 넘겨주면서 히말라야도 다녀온 영험한 녀석들이라고 우스개 소리를 하였었다.

비개인 하늘은 짙푸르다 못해 눈이 부시다. 낮은 지붕들이 게딱지 같이 들어선 변두리 좁은 골목골목을 지나 버스정류소로 향했다. 마을은 농촌에서 유입된 농민들이나 도시계획으로 변두리로 내몰린 하층 노동자들이 산비탈에 집단 취락지역을 만들면서 생겨난 판자촌이었다가, 도시 새마을운동으로 판자가 슬레이트와 블록으로 교체되기는 했지만 비좁고 불결하기는 별반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동네이름을 ‘빨랫골’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주거지가 생기기전 물많고 볕좋은 빨래터가 있어서인지, 현재 집집의 마당이나 공터에 빨래가 많이 널려 있어서인지 그 이름의 유래는 알 수가 없으나 전자인 것으로 믿고 싶다.

골목을 지나면서 열린 문틈 사이로 곳곳 집안 풍경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방안에 인형을 수북이 쌓아놓고 홀로 앉아 부업을 하는 중년의 여인이 있다. 꼬마 아이가 물장난을 하는 옆에서 펌프질을 하는 젊은 여인도 보인다. 좁은 툇마루에 앉아 햇볕을 쬐는 노인이 있다. 집을 개조해 만든 비좁은 지하 공장에서 골판지를 만지작거리는 여공들도 보인다. 신산스러운 생의 한 단면들이 흑백 무성영화처럼 흘러간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난장이의 아이는 “천국에 사는 사람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단 하루도 천국을 생각해보지 않은 날이 없다.”라고 울부짖었었다. 그러나 내가 본 무성영화 속의 그네들은 천국을 꿈꾸지도 지옥에 산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 것 같다. 소리없는 방관자로 그저 하루하루를 이어가고 있는 것만 같다. 끼니를 해결할 일터가 있고, 가족들이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있다는 것에 만족해하면서.

버스를 잡아타고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선배들은 이미 삼삼오오 모여 있었고, 나와 함께 입문한 경제학과 인철이와 수의학과 석주도 이미 와 있었다.
인철은 집이 서울 도봉산 밑이라고 했는데 어릴 때부터 동네 형들을 따라다니며 산에 반쯤 미쳐 있었고, 이미 등반실력이 상당하다고 했다. 아마도 자신은 학업보다는 전문적인 등반가가 되어야 할 운명이 아닐까 고민한다고 했다.
석주는 전라도 어느 도시에서 상경한 녀석으로 아버지가 박수무당이라고 했다. 아버지를 따라 굿판을 다녔는데 명당자리를 찾아 이산저산을 돌아다녀보니 이상하게도 명당 자리는 사람들이 잘 오르지 못하는 바위 위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더 좋은 명당에 오를 수 있기 위해 암벽등반을 배울 필요를 느꼈다고 했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박수무당이 될 거는 아니였지만 그런 명당자리에서 참선을 하면 정신이 맑아지고, 무언가 예지를 얻는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대학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술과 담배에 절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고등학교 선배이고 같은과 선배이기도 한 강충모 형이 산에나 다니자며 끌려온 터였다.

‘도시 사람들은 왜 산에 오를까, 더욱이 취미생활로 산에 오른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콘크리트와 매연을 벗어나고픈 자연회귀의 욕구 정도로만 어렴풋이 짐작될 뿐이었다. 산은 그저 봄이면 배곯지 말라고 산나물을 제공하고, 겨울이면 땔감을 얻거나 토끼나 노루 사냥을 하는 생활의 터전일 뿐이었으므로 거기서 무슨 호연지기를 키우고, 인생을 배운다는 말인지 참으로 우스운 이야기였다. 놀이삼아 산을 오른 것은 할머니와 함께 사월초파일이나 동짓날 산너머 봉황사에 가보는 것이 전부였고, 그것도 산이 목적은 아니었었다. 절은 왜 산에만 있는지 투덜거리면서 말이다.

‘왜 산에 오르는지, 학교나 직장에 산악부니 산악회는 왜 그렇게도 많은 것인지’ 의문을 품고 일행들 뒤를 말없이 뒤따랐다. 산을 오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등반실력이 상당하다는 인철과 첩첩산중 명승지를 다녀보았다는 석주도 헐떡거리며 뒤쳐져 있을 때 나는 선배들이 넘겨준 자일과 그 밖의 장비를 담아 무거워진 배당을 메고도 산보하듯 뒤따라 갈 수 있었다.

선배들은 소질이 있다며 추겨세웠고, 30분쯤 오르자 숲속에 감춰져 있던 것만 같던 거대한 바위가 바로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인수봉 대슬랩 아래였다. 그곳엔 이미 한무리의 산꾼들이 옹기종기 모여 등반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산악부 회원중 먼저 도착한 축이다. 그중에 지난밤 노래하던 그 여학생도 끼어있었고, 우리 일행을 보자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아는체를 했다. 내게 손을 흔드는 것으로 착각하여 순간 움찔하였다.

그녀는 중키에 마르지는 않았지만 날렵한 몸매였다. 탄력있는 허벅지가 몸에 꽉끼는 바지를 뚫고 비어져 나올 것만 같았다. 민낯에 웃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항상 살가운 미소가 어려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어른스러운 노련함 같은 것이 베어 있었고, 상대적으로 우리는 철딱서니 없는 어린 동생들처럼 여겨졌다. 그것은 2년이라는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닌 듯 싶었다. 그녀가 나와 인철, 석주 신입회원 3명을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바위 쪽으로 인도하였다.

“반갑다, 산악회에 가입한 것을 축하한다, 나는 민주란이라고 한다, 영문과 3학년이야, 너희들, 산에 올 때는 제각각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산악회에 들어온 이상 일단 등반기술을 익히는 것이 기본이다, 그래 공통필수과목이라고 해두자, 무슨 일이든 기본이 중요하지, 기본만 잘 닦아두면 그 후 응용은 마음대로 해도 돼, 그 전까지는 조교인 내 말을 잘 들어야 한다, 또 잘 알겠지만 등반은 무엇보다 안전이 생명이다, 죽으려고 이짓을 하는 것은 아니니까, 너희들, 바위 위에서는 항상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돼, 그렇지 않으면 혼자만 죽는게 아니라 함께 다 황천길로 갈 수 있어, 그래서 자일파트너는 아무하고나 하는 것이 아니지, 목숨을 맡길 만큼 믿음이 생겨야 하는 거야, 너희들과 나는 특별한 인연으로 만난거다, 아마 부부보다도 더 끈끈한 인연일 수 있다, 서로의 생명을 맡길 수도 있으니까, 앞으로 내가 너희들의 기초 훈련을 맡을거다, 잘 따라하고, 오래도록 산친구로 함께 남을 수 있도록 열심히 해보자, 알겠나”

부부라는 말에 불순한 상상을 하다가도 호의적인 인상과는 달리 단호하고 절도있는 목소리에 우리들은 이내 주눅이 들었다, 얼떨결에 “네 알겠습니다.”라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훈련병처럼 등반을 배우기 시작했다. 바위를 오르내리는 자세, 매듭법, 확보법, 하강법을 습득했다. 그런 다음 대슬랩으로 옮겨 경사진 바위 위에서 오르고 내리고를 연습하였다. 평지에서처럼 자연스럽게 걸을 수 있을 때까지 반복 또 반복하였다.

“몸을 똑바로 세워, 산은 기울어져 있어도 지구의 중력은 산의 각도와 같지 않다, 지구의 중심이 어디인지 생각하고 걸어라, 바위에 몸을 붙이지 말고, 그러면 미끄러져, 너무 큰 걸음으로 오르지 말고 조금씩 올라, 전방에 손으로 잡을 곳을 미리 탐색하고”
“야야, 꼬마들, 정신 못차리는구만, 하강할 땐 오른손을 놓지 말라고 했지”
“올라갈 때 아래는 쳐다보지 말고”
“다른 사람이 올라갈 땐 확보에만 신경써야지 한눈팔면 어떻게, 추락하면 니가 제 목숨 책임질꺼야“
계속되는 그녀의 고함소리들 들으며 초보 등반가들은 땀을 뻘뻘 흘렸다. 선홍빛 노을이 저쪽편 산마루에 걸릴 때까지.
몇 번의 훈련이 더 있고 나서 그녀가 선등을 서고, 우리가 그 뒤를 따라 인수봉중에서도 그닥 어렵지 않은 코스로 꼭대기까지 올라 갈 수 있었다. 선등을 서는 그녀의 뒷모습은 한 마리 표범이었다. 물흐르듯 흠잡을 데 없는 유연한 자세, 어려운 지점에서도 머뭇거리지 않는 과감한 몸놀림, 뒷사람들이 모두 안전하게 올라올 때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는 세심한 배려까지, 바위와 혼연일체가 되어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낭비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 이런 허튼 짓을 왜 해야하나’라는 의문이 풀리지 않았지만 나중에 그만두더라도 왜 허튼 짓인지 알고나 그만두자고 마음을 굳힌 후로는 한번도 빠지지 않고 매주 그녀를 따라다녔다. 덧붙이자면 처음으로 나에게 격정을 불러일으켰던 그녀의 인간적인 비밀을 알아보고 싶은 은밀한 유혹도 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날 인수봉 오아시스에서 민주란에게 물었다. “선배님, 암벽등반은 왜 배우나요, 굳이 이러지 않아도 산에 오르는 길은 많은데....”,

“산은 처음부터 길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우리가 다니는 등산로도 누군가 만들어 놓은 것이고, 우리는 그 길로 다닐 뿐이지, 그러나 진짜 산을 오르게 되면 그러니까 아무도 가지 않은 미답의 땅을 밟으려면 스스로 길을 내며 가야하고, 돌아갈 수 없는 바위를 만나면 어쩔 수 없이 올라가야 하고, 얼음산을 만나면 그 또한 딛고 올라가야 하지 않겠니, 암벽등반이나 빙벽등반은 산에 오르는 모든 행위들중 하나일 뿐이지, 지금은 그 자체가 등산과 관련 없는 하나의 전문분야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아무도 가지 않은 어려운 길을 가보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 연습하는 거야, 알겠어”
“응, 그렇군요”
나는 ‘왜 아무도 가지 않은 어려운 길을 가보려고 하는 것이지요?“라고 묻고 싶은 것을 참으며 대충 알겠다는 듯 혼자말을 했다.

민주란은 몇 명 되지 않는 산악부 여학생중 한명이었다. 대부분 여성 회원을 많이 확보하려는 산악부의 암묵적인 염원에 따라 남자 선배 또는 남자 친구의 손에 억지로 끌려왔거나 색다른 경험을 찾아 용감하게 들어왔다가 별 재미를 찾지 못하고 그만두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가 여성스러움이라고 알고 있는 몇몇 가치에 흠집이 날 수도 있다는 우려도 중도포기의 중요한 이유일 터였다. 또 힘에 부치거나 고소공포증 등 육체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민주란은 아버지를 따라 산에 다녔는데 어느날 설악산 울산바위에서 암벽등반을 하고 있던 대학 산악부를 보고는 대학에 들어가면 꼭 산악부에 들어가겠다고 다짐했고, 입학하자마자 산악부를 찾았다고 했다. 지금은 남자들 보다도 더 열성적인 바위꾼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허튼 짓이라는 생각에 별반 변화는 없었지만 어떤 의미를 제거하고 등반 그 자체로만 보면 색다른 경험임에는 틀림없었다. 나도 자츰 그 깊은 맛에 매료되어 갔던 것이다. 산을 내려와도 손 끝에 바위의 촉감이 계속해서 남아 있었고, 실패했던 구간이 떠오르면 다음엔 이리저리 해야겠다는 상상을 하고는 했다. 죽음이 늘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는 우리의 생도 대자연 앞에서 한점 티끌일 뿐이라는 진리를 깨닫게 해주었다. 욕망, 좌절, 실패, 공포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목숨을 건 도전은 또 얼마나 짜릿한가.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가는 인생이라면 생에 한번쯤은 무언가를 위해 또는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수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무엇보다도 등반은 파국으로 치닫고 있던 내 젊은 날에 휴식이 되어 주었다. 그렇게 나 또한 열성분자가 되어 갔다. 그러면서 민주란과 나는 호흡이 잘 맞는 자일 파트너가 되어 갔다. 서로 목숨을 내주어도 되는 사이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었다. 부부사이보다도 더 특별한 인연이라는 그것 말이다. 그 특별한 인연 때문에라도 산에 가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지금도 산에 오를 때면 그녀가 앞서거니 뒷서거니 길을 인도하는 환상에 빠질 때가 있다.

저녁엔 인수봉 꼭대기에서 비박을 하고는 했고, 어김없이 술판이 벌어졌다. 당시 혼란스러운 시국에 대해서나, 졸업후 무엇을 해야할지, 군대는 언제 가야할지 등등 그 나이에 어울리는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오갔다. 그 외 단연 산에 대한 토론이 주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등반대장 장태산은 신입들을 앉혀놓고 일장 연설을 하고는 했다. “아주 옛날부터 산에 오르는 일은 있어 왔지, 사냥이라던가 더 높은 곳에서 신을 맞이하려는 신앙적인 이유 등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 때는 높은 설산이라던가, 깎아지른 암벽이나 빙벽으로 이루어진 산들은 아무도 오를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대로 신의 영역으로 남겨져 있었겠지, 그곳엔 악마가 살고 있다고 믿기도 했고,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18세기 말에 소쉬르라는 사람이 4,800미터급 몽블랑 정상에 서면서 근대 등산의 역사는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 후로 알프스의 여러 정상들이 정복되기 시작했지, 처음에는 가이드를 앞세워 가장 쉬운 코스를 선택해 정상에 오르기만 하면 된다는 전통적인 등정주의(登頂主義)가 대세였지, 산을 누가 먼저 정복하느냐에 초점이 맞추어졌던 것이지”
“시기로 보면 서구의 무자비한 정복주의, 제국주의의 정신이 산에까지 영향을 미쳤던 것이군요” 석주가 물었다.
“그 후 서구 열강이 알프스와 히말라야의 봉우리들을 먼저 정복하기 위해 국가적인 차원에서 경쟁적으로 자국의 등반가들을 지원했던 것을 보면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 장태산이 대꾸했다.
“그렇다면 저희가 하고 있는 등반도 별로 유쾌하지는 않은데요” 석주가 말했다.
“등정주의에 대한 반성으로 생겨난 것이 등로주의(登路主義)라는 것이다. 쉬운 능선을 따라 경쟁적으로 정상에 오르기보다는 절벽 등 어려운 루트를 직접 개척해 가며 역경을 극복해 나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그러니까 높은 산, 새로운 산, 험난한 산에 오른다든지, 등산하는 자체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찾는 것이지, 영국의 등반가 머머리가 19세기 말에 주창한 등반 정신이야, 그러나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머머리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어, 이단아, 반역아라고 했지, 그러다 1930년대에 마터호른 북벽이 정복되고, 1953년 에드먼트 힐러리와 셰르파 텐징이 에베레스트를 등정하고, 1960년대에는 히말라야산맥의 8,000m급 봉우리 14개가 모두 등정되면서 현대의 등반 사조로 정착되기에 이르렀어, 머머리의 이름을 따서 머머리즘이라고도 하고 알프스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여 알피니즘이라고도 하지, 그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등산하는 사람들을 알피니스트라고 하고, 오늘날 행해지는 알파인 스타일이나 무산소 등반 역시 머머리즘에 입각한 등산의 형태이지” 장태산이 설명했다.
“알파인 스타일은 또 다른 것인가요.” 석주가 물었다.
“크게 보면 알피니즘의 일종이고 같은 말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알파인 스타일(Alpine style)이란 자신의 식량, 침낭, 장비 등 모든 것을 스스로 가지고 가는 방식의 등반을 말하지, 대규모 셰르파를 동원해서 캠프를 단계적으로 설치하고 셰르파의 안내를 받아 또는 이미 깔아놓은 고정로프를 이용해 정해진 능선을 따라 등반하는 정복형 스타일과 대비되지, 포터, 산소기구, 고정된 로프의 사용을 하지 않아, 라인홀트 메스너가 보조 산소기구 없이 가셔브룸 1봉을 등반하면서 유명해지게 되었지” 장태산이 말했다.
“와, 그 높은 곳을 산소기구 없이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인가요.” 석주가 물었다.
“물론 아무나 할 수 없는 거지, 타고난 체력과 수많은 경험이 있어야 하겠지”
“등정주의니 등로주의니 하는 것들도 사실은 사람이 만들어낸 것 아닌가요, 어쨓든 자연을 정복한다는 의미에서는 그 방법만 달랐지, 결국엔 같은 것이고, 등로주의도 듣기에는 그럴듯하지만 인간의 채울 수 없는 욕망을 미화시킨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요, 제가 보기에 바위 여기저기에 하켄이나 볼트를 박는 것도 산을 상하게 하는 것이고, 이것은 알피니즘과도 모순되는 것 아닌가요, 산은 그 자체로 남겨둘 수는 없는 건가요, 진정으로 산을 사랑한다면, 아무런 장비없이 오르지 못할 거라면 옛사람들이 그랬듯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두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무슨 무슨 주의를 핑계삼아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인가요, 사람들이 모든 것을 다 정복해야 한다는 생각은 동기야 어떻든 지나친 오만이 아닐까요” 술에 취한 내가 비꼬듯 한마디 했다.
“너, 그러면 여기는 왜 따라왔냐” 장태산이 힐난하듯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자자, 어려운 이야기는 그만들 하시고, 별헤는 밤이 있어 좋고, 술이 있어 좋고, 산친구들이 있어 좋고, 그것으로 충분하지 아니한가요, 술이나 마십시다”
자칫 싸움판으로 번질 수 있는 상황을 민주란이 나서서 정리했고, 모두들 각자의 침낭에 들어가 잠이 들었다.

그렇게 의견대립이 있었지만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주말이면 또 의기투합하여 어김없이 산을 찾았다. 생의 최전선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동규에겐 미안하기 그지 없었다. 서울에 와서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유람이나 다니고 몹쓸 짓을 하고 있는 듯하여 늘 바늘방석이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이미 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니 주란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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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awm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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