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휘영각에 이는 바람

 

“임국장! 지난 번에 내가 한 말은 잘 생각해보았나, 이번 일만 성사되면 자네에게도 좋은 일이 있을게야, 아니 나머지 인생 내가 책임질 수도 있지. 자네도 구만리장천을 날아봐야 하지 않겠나, 여기서 추락하기엔 자네 재능이 너무 아까워서 아는 말이네, 아직 아이들도 어리다고 했지, 잘 생각해보게” 매서운 눈매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50대 중반의 사네가 임국장이라는 사람에게 반은 협박조로 반은 설득조로 무언가 결정할 것을 종용하고 있었다.

“자 한잔 받게나, 유럽에 갔다가 특별히 자네를 위해 사온 걸세” 사내는 임국장에게 루이 13세 양주를 한잔 따라주면서도 생색내는 것을 잊지 않는다. 사내는 평소 이런 류의 검은 거래를 많이 해본 사람답게 상대방을 다루는 솜씨가 능수능란하였다.

‘상대방의 눈앞에 당근을 집어던진다. 처음에 상대방은 경계할 것이다. 상대방의 헛점을 파악하고 인간적으로 파고든다. 상대방은 서서히 긴장을 풀면서 어느 순간 당근을 덥석 물게 될 것이다. 그러면 목표의 반이상은 성사된 거나 다름없다. 그 다음부터는 주도권을 빼앗고 상대방은 충실한 하수인이 될 것이며,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이다.’ 사내는 입가에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속에선 임국장에게 어떻게 그물을 놓을지 묘안이 번득이고 있다.

임국장은 경직된 자세로 사내가 건넨 잔을 마지못해 받아 상위에 내려놓고는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다. 임국장은 1급수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돈과 여자와 술의 유혹으로부터는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깨끗한 사생활을 지켜왔다고 자부하고 있다. 그래서 주변의 이런저런 부탁에도 당당할 수 있었다. 여기서 무너진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치 않는다. 하지만 사내의 집요함에는 거부가기 힘든 마력이 있었다.

“장회장님, 그동안 장회장남 도움을 많이 받았고 저를 생각해주시는 건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마만 이번 일은 워낙 위험부담이 커서 저 혼자 결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요...” 임국장이 이제까지의 완고한 태도에서 한발 물러나면서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말꼬리를 흐린다.

‘이제 걸려들었군, 그래 너도 별 수 없지, 세상에 돈으로 해결하지 못할 건 없어, 조금만 지나면 발정난 개처럼 먼저 덤벼들겠지’ 장회장은 느긋하게 양주잔을 들어 입속에 한번에 털어 넣는다.

“얘들아 너희들은 잠시 나가 있어라” 장회장은 임국장이 독대하기를 바란다는 것을 알아채고 시중들던 아가씨들을 내보냈다. 장회장은 이런 일엔 이골이 나 있던 터라 본격적으로 임국장의 목을 틀어쥘 것이다. 


영주가 바깥으로 나오자 푸르스름한 하늘에 초승달이 외롭게 걸려있다. 넓은 정원 숲에는 노각나무, 호랑각시나무, 금송, 주목 등 오랜 세월의 풍파를 이겨낸 조경수들이 갖가지 모양으로 위엄을 뽑내고 있다. 다만 인위적으로 모양을 낸 풍이 이곳이 대자연의 품속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해주어 아쉽기는 하다. 숲 저편으로 서울의 야경이 안개빛처럼 희붐하다. 영주는 깊은 숨을 들이쉬며 정원 숲속에서 비감에 젖은 서울의 달빛을 쳐다본다. 한정식집 휘영각은 방마다 불이 켜져 있고, 흥에 겨운 사내들의 그림자들이 한지를 바른 방문을 통해 어른거린다. 방문에 드러난 그림자들을 보노라면 온갖 탐욕과 음모의 화신들이 춤추고 있는 것만 같아 기괴하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그럴 때면 영주는 자신이 일했던 공장의 한 때가 떠오르며, 막연한 적개심이 고개를 들고는 한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바닥을 벗어날 수 없었던 그때와 비교하면 이런 세상이 존재한다는 건 지금도 충격일 수 밖에 없었다. 


영주가 이곳에 온지도 어느덧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러니까 영주가 이곳에 오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천당과 지옥을 오가며 영우와의 한철을 보내고 나서 영주는 심한 열병을 겪었었고, 죽음의 문턱에서 극적으로 깨어났었다. 인생에 스스로 목숨을 걸만큼 심각한 일이란 애초에 있지도 않으며, 자신이 겪은 일은 호수에 던져진 조약돌의 파장만큼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우와의 일은 그저 약간의 손해를 본 도박일 뿐이었다. 그럭저럭 살아지는 것이고, 막다른 골목이라 생각되던 순간도 지나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기쁨도 슬픔도 영원한 것은 없다. 운명이 흘러가는대로 몸을 의탁할 뿐 의지나 믿음 따위는 무의미하다. 선악은 동전의 양면처럼 구분이 애매모호하다. 절대적인 것은 없으며, 선과 악도 주관적인 판단에 따라 바뀔 수 있다. 영주는 여공 생활을 그만두고 남은 돈을 다 써버리기로 하고 홀로 여행길에 올랐었고, 여행을 통해 내린 나름의 결론이었다. 그 결론이 설사 잘못이었다고 하더라도 그 또한 영주의 몫이었다. 좋은 말로 하면 이제야 뚜렷한 자아를 찾았다고나 할까.

 

여행을 하다가 돈이 떨어지면 그 다음 일은 그 때가서 생각하기로 했다. 강원도 골짝골짝을 훑고 삼남을 돌아 부산의 보육원 앞까지 갔지만 끝내 보육원엔 들어가지 못한채 먼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하고 돌아서야 했다. 여행을 마치고 서울에 도착했을 땐 십수년을 악착같이 모아둔 돈도 바닥이 났지만 마음은 홀가분했다. 서울역에서 내려 걷고 또 걷다가 처음 일자리를 허락해주는 곳에서 무조건 일하기로 했다. 종로통을 지나 조금 한적한 어느 곳에 이르자 한옥집이 보였고, 대문에 ‘월수 200만원, 종업원 구함’이라는 구인광고가 붙여진 것이 눈에 띄었다. 영주는 앞뒤 잴 것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이 한정식집 휘영각이었다. 휘영각(輝映閣)이라, 밝게 비치는 집이라는 뜻이니 그 장소가 다른 곳보다 특별히 밝다는 뜻인지, 아니면 그 집이 세상을 밝게 비춘다는 뜻인지 알 수 없지만 이름은 그럴듯 했다. 이름만으론 그 옛날 은둔한 문사들이 모여 시를 읇고 철학을 논하던 장소처럼 생각되어지기도 했다.

 

개성이 고향이고 1.4 후퇴때 서울로 넘어와 저자거리 허름한 국밥집에서부터 출발하여 온갖 풍상을 이기고 이곳을 20년째 일구어 왔다는 60대의 여사장은 영주를 처음 보고는 두말없이 출근을 허락했다. 여사장은 남편이 인민군에 끌려가 전사한 후로 청상과부로 평생을 지냈고, 지금은 그 외동딸이 휘영각을 운영하고 있었다. 외동딸은 남편의 여식이라고도 하고 어느 고관대작과의 바람같은 하루밤 인연이 만들어낸 사랑의 결실이라고도 하였지만 그 비밀은 당사자들만 알고 있을 터였다. 여사장은 한창 젊었을 땐 멀리서도 후광이 비출 정도로 뛰어난 미모였다고 하는데 그 때문인지 휘영각은 장안에서 행세께나 하는 사내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였고, 역사에 이름 한줄이라도 올라간 명망가들의 숨겨진 밤의 이야기들을 간직하고 있었다. 사장의 외동딸이 운영을 맡은 후로 여종업원들에게 유니폼을 입히고, 밤에는 손님들의 술시중을 들게 하였다. 그러면서 ‘술자리에서 들은 이야기는 절대 발설하면 안된다’, ‘지난 밤에 누가 왔었는지 쥐도 새도 몰라야 한다’. ‘손님들이 아무리 무례한 행동을 해도 절대 화를 내서는 안된다’는 등의 수칙을 만들어 여종업들을 교육시켰다. 휘영각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현대적인 조직을 갖춘 것이다. 휘영각은 이제 거물급 정제계 인사들이 드나들며 그들만의 질펀한 사교의 장으로서 또는 마음놓고 은밀한 거래가 오가는 장소가 되어 있었다. 여사장은 예전의 낭만을 잃었다며 못마땅해 했지만 살아남기 위한 변화의 바람은 어쩔 수 없었다.


영주가 하는 일이라야 주방일을 돕거나 음식을 나르는 일이 주였지만 여느 식당과 다른 점이 있다면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밤에는 가끔씩 손님들의 옆에서 술시중을 드는 것과 술취한 손님들의 농짓거리를 받아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정도 어려움은 공장 생활에 비하면 천국이나 다름 없었고, 그러면서도 수입은 훨씬 많았다. 한번 팁으로 한달 월급의 절반에 해당하는 100만원을 받는 건 예삿일이었다. 남자들의 술자리에서 늘 있기 마련인 성관계를 요구받을 경우 그것은 여종업원들의 자유선택이었다. 영주도 가끔 그런 성적인 추근거림을 받기는 했으나 그것만은 선뜻 따를 수 없었다. 정중하게 거절하는 법도 배웠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경제적으로는 아무런 불편이 없었으므로 몸을 팔아서까지 돈을 벌고 싶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과음을 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공장에서 매케한 화공약품 냄새와 쇠가루 날리는 먼지를 들이마시며 일하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고된 노동이야말로 건강한 삶이고 인간의 유일한 축복이다’라는 노동의 찬가에 얼마나 속아왔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남자들의 세계, 아니 가진자들, 힘있는 남자들의 세계는 멀리 있지 않았다. 그들이 사회의 상층부에 진입할 수 있었던 건 특출난 능력이 있거나 남다르게 부지런하기 때문인 경우도 더러 있었지만 대부분은 보통 사람들보다는 좀 더 간교하고 좀 더 사악하고 좀 더 탐욕스럽기 때문이었다. 날 때부터 가진 것이 넘쳐났거나 많은 기회가 주어졌을 수도 있고. 영주의 순수했던 영혼은 일그러진 세상을 접하면서 그렇게 조금씩 타락되어 갔다. 하긴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아무도 속단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고, 이 시대의 가치가 물신숭매, 물신만능이고, 그것이 행복의 척도가 되거나 대다수의 사람들의 바람이라면 누구도 영주에게 손가락질만은 할 수 없으리라.

 

영주는 이런저런 상념에 몰두해 있다가 장회장의 방으로 다시 불려갔다. 장회장은 단골손님중 한명이었지만 영주는 기회가 없어서 그 때 처음 그를 보았다. 장회장은 군장성출실인데 기업계에서는 입지전적 인물이라고 했다. 민주화의 물결을 타고 과거 군부독재 시절 위세등등하던 정객들은 하나 둘씩 단죄되거나 사라져갔지만 장회장은 오히려 정치바닥에서 일치감치 밀려난 것이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전화위복이 되었던 것이다. 장회장의 경력과 화려한 인맥은 그가 운영하는 봉황그룹이 거침없이 성장해갈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봉황그룹은 조그마한 건설회사에서 시작하여 200만호 주택건설의 붐을 타고 급성장하였다. 그 후로도 장회장은 동물적 감각과 남다른 수완으로 돈이 되는 사업영역을 계속 확장하여 이제는 국내 10대 그룹을 넘보고 있었다. 임국장은 금감원에 근무하는 실권자로서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사실상 장회장의 도움을 받은 바 컸다. 또 앞으로도 상당기간 장회장은 든든한 힘이 되어줄 것이었다. 장회장은 자신이 뿌린 씨를 거두기 위해 오랫동안 참았던 칼을 빼든 것이다. 결정적인 한 순간을 위해 키워온 임국장이 그의 칼이 되어줄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합의가 있었는지 처음의 어색했던 분위기는 음담패설까지 오가며 최고조에 올랐고, 덩달아 영주도 임국장의 옆에서 끊임없이 은밀한 부위를 더듬는 그의 손길을 참아가며 많은 술을 마셨다. 영주는 늦은 밤 집으로 돌아와 가방에서 수북한 현금 다발을 꺼내 바닥에 내팽개친 다음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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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awm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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