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한방울의 피... 진실의 서막


여름은 성큼성큼 다가왔다. 여린 연두색 빛깔의 나뭇잎들은 태양의 빛을 머금고 자라나 이젠 짙푸른 물결로 산과 들을 뒤덮고 있다. 바야흐로 성하의 계절이다. H경찰서 홍반장이 땀을 뻘뻘 흘리며 두툼한 기록뭉치를 들고 검사실에 불쑥 나타났다.

 

“어, 홍반장님! 연락도 없이 왠일이십니까?”

“지금까지 수사한 내용입니다. 한번 검토해 보시고 추가 수사할 사항이 있으면 지휘해 주십시요. 송치 담당편에 보내면 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 직접 들고 왔습니다. 또 급하게 보고드릴 일도 있고...” 홍반장이 기록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홍반장은 정년퇴임을 얼마 남겨두지 않았음에도 전혀 몸을 사리지 않았다. 한창 나이의 경찰관들도 그 앞에서는 업무가 많다고 꾀를 부리거나 투덜댈 수 없었다. 후배들은 이제는 뒷전에서 좀 쉬라고 하지만 본인은 몸이 근지러워서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직접 현장을 뛰어야 직성이 풀리고, 살아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의 그런 집중력과 투지는 나도 존경하는 바였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 동안 추가로 밝혀낸 것들이 있으신가 보군요.”

“네, 몇가지 있습니다, 민주란이 입국후 어떻게 살았는지 목포에 내려가 직접 조사했습니다.”

 

“민주란의 행적이 어떻던가요”

“그 부분은 설명하기 좀 길고, 기록을 한번 보면 아실 겁니다. 그것보다 우선 지난번 현장검증 했던 다리 부근에 공사현장이 있지 않았습니까. 시공사는 D건설사입니다. 그곳에 현장사무실이 있고, 야적장에 공사자재를 보관하고 있습니다. 밤에도 현장사무실에서 한명씩 지키기는 하는데 절도 사건이 왕왕 발생해서 감시카메라를 설치해 놓았더군요. 혹시나 해서 사건 당일 무슨 일이 있었나 알아보니 승용차 2대가 현장사무실 야적장 공터에 들어왔었다고 하더군요. 그날 아침 촬영된 화면을 돌려보았지만 물건이 없어지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심야에 카섹스라도 하러 들어온 남녀들인 것으로 알고 대수롭지 않게 지나갔다고 하더군요.”

“승용차 2대와 이번 사건하고 관련이 있습니까?”

“다행이 당시 승용차가 정차해 있던 화면이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기록에도 화면을 복사한 CD를 첨부했구요. 2대의 차량이 약 5분쯤 나란히 공터에 서 있었는데 한쪽 차량 조수석에서 한명이 내렸고, 뒤이어 양쪽 차량에서 3명과 2명 총 5명이 밖으로 나와 야적장 바깥으로 나갔습니다. 현장사무소 공터에서 나오면 도로가 있고, 도로를 건너면 이전에 저희가 갔던 다리로 이어집니다. 승용차가 정차해 있던 곳은 카메라 위치에서 좀 멀리 떨어진 곳이고, 화면상으로는 차량 앞쪽 절반 부분은 잘려 있습니다. 또 내린 사람들은 금방 화면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하반신만 보입니다. 화면을 느리게 여러차례 재생해보니 처음에 내린 사람은 청바지 차림이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양복 기지바지로 보입니다. 또 처음에 내렸던 청바지는 맨발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소리도 들리지 않고 내린 사람들이 몇발자국 떼지 않아 화면에서 금방 사라졌기 때문에 언뜻 보면 여러 명이 차에서 내려 평화롭게 이동한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청바지는 황급하게 뛰어갔고, 뒤따라 내린 사람들도 무척 다급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차에서 내리고 나서 30여분쯤 후에 다시 돌아왔는데 청바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승용차 2대의 차량번호는 식별이 되던가요?”

“네, 화면을 확대해서 살펴보니까 다행히 차량번호는 식별이 가능했습니다. 차량번호를 조회해보니 모두 같은 회사의 리스차량입니다. 리스 회사에 차량을 빌린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았는데 서울에 있는 ME(Mother Earth, 우리말로는 大地)라는 시행사입니다.”

“시행사에서 업무차 그곳을 지나갔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네, 그래서 그 시행사에 알아보니 자신들은 명의만 빌려주었고, 실제로 2대의 차량은 봉황그룹에서 사용했다고 하더군요? 또 그쪽으로 ME사의 현장은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봉황그룹이라구요, 그렇다면 차량에서 내린 사람들은 봉황그룹 직원이란 말인가요?”

“봉황그룹에 ME사가 리스받은 차량의 사용여부를 알아보았더니 확인해 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필요하면 영장을 가져오라고 오히려 큰소리 치더군요. 여러모로 차량에서 내린 사람들과 봉황그룹과의 관련성을 조사해보았는데 사고현장 부근에 봉황그룹 장학모 회장의 별장이 있었습니다.”

“별장이라구요?”

“네, 그렇습니다. 저희가 파악한 바로는 별장은 다리로부터 약 5킬로미터 떨어진 H강 상류 부근에 있습니다. 도로 공사현장 야적장에서 나와 상류쪽 도로로 계속 가다가 오른쪽 비포장 길로 빠져 500미터 정도 가면 강건너편에 별장이 있습니다. 배를 타고서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별장 뒤편은 울창한 숲이고 길도 없어서 그쪽으로는 접근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별장은 도로에서는 보이지 않고, 선착장에나 가야 겨우 보입니다. 저도 20년간 이곳에 근무했고, 관내 곳곳에 부자들 별장이 많이 있기는 하지만 장학모의 별장은 처음 가보았습니다. 별장은 거의 섬이나 요새와 다름 없었습니다. 별장으로 가는 유일한 통로는 선착장에서 배를 타는 것입니다. 물론 그곳 선착장이 아니어도 다른 곳에서 배를 타고 갈 수는 있겠지만 경계가 삼엄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별장에 가까이 접근할 수는 없었습니다. 선착장에 몰래 가보니 상당히 넓은 주차장이 잘 꾸며져 있었고, 차량들이 주차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공사현장에 정차해 있던 그 차량들이었습니다”

 

“그 차량들이 그곳에 왜 있었던 것인가요, 거기다 차량을 버렸다는 건가요?”

“아닙니다. 거기서 말끔하게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2교대로 2-3명씩 보초를 서고 있었습니다. 선착장에 모터 보트가 정박해 있었구요. 그곳 선착장을 통하지 않으면 별장으로 출입은 어렵기 때문에 아마도 그곳을 지키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강건너 맞은편 선착장에도 사람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구요.”

“무슨 비밀이 많아서 사설 경비까지 동원했을까요?”

“일반인들에게 노출을 꺼리기 싫어서일 수도 있고, 밝혀지만 안되는 곳일 수도 있겠지요”

“그럼 보초서는 사람들 인적사항은 파악해 보셨나요?”

“네, 배를 타고 멀리서 낚시꾼을 가장해 망원렌즈로 얼굴 사진을 모두 찍었습니다. 확인해보니 경찰청 관리대상 조직폭력배들이더군요. ‘울트라’파 조직원들인데 ‘울트라’파는 서울 청량리 588을 무대로 활동하던 소규모 조직에서 성장한 조직입니다. 두목이 김수창이라는 놈인데 경찰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아주 잔인하기로 소문이 자자하다고 합니다. 조직원들도 마찬가지구요. 백주대낮에 서슴없이 회칼이나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는 건 예사고, 총기까지 소지하고 있다는 정보도 있습니다. 세력을 확장해서 지금은 동대문, 종로 일대까지 장악하고 있고, 전국조직으로 크고 있다고 합니다. 보초서는 놈들은 그 행동대원들이구요. 이전에는 사창가나 유흥주점 업주들을 상대로 금품이나 갈취하면서 기생하다가 요즘엔 떳떳하게 회사를 차려놓고 겉으로 보기엔 합법적으로 사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주로 건설현장이나 재개발현장의 철거물 처리업을 맡아 하고 있는데 봉황건설 현장에서는 어김없이 그놈들이 이권을 따내고 있습니다.”



“봉황건설에서는 사업미끼를 주고 그 대가로 조직원들이 장학모 회장의 보디가드 역할을 맡고 있다는 말인가요.”

“네, 회장의 개인적인 보디가드 역할 뿐 아니라 봉황건설의 재개발 철거현장에서 용역깡패일도 도맡아 하고, 그외 불법이 동원되는 일이나 지저분한 뒤치닥거리는 울트라 조폭이 나서서 다 처리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무언가 낌새가 있는 것 같은데 그 조폭들과 이번 사건하고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까요?”

“저희가 사이안산 성분이 들어간 농약을 구입한 사람이 있는지 농약 판매상들을 모두 조사했습니다. H읍내에 농약 판매상이 30여군데 있는데 최근 '쑥쑥 농약'이라는 상점에서 사이안산 성분이 들어간 농약을 구입해간 사람이 있다고 하더군요, 상점 주인은 인근의 농부가 아니고 양복 입은 젊은 사람이어서 잘 기억한다고 했습니다. 전원주택에서 텃밭을 가꾸고 있는데 밤에 들쥐들이 나다녀서 필요하다고 했다더군요. 그래서 놈들의 사진을 보여주었더니 그중 한놈이 틀림없다고 했습니다.”

 

“그것만 가지고는 놈들을 잡아들이기에 부족하지 않을까요?”

“지난번 민주란을 부검하지 않았습니까. 감정서가 오기 전에 구두로만 말씀드렸는데, 정식으로 감정서가 도착했습니다. 사인(死因)은 지난번 말씀드린 바와 같고, 특이한 점은 손톱에서 피부껍질과 미세한 혈흔이 나왔습니다. 국과수에서 DNA 분석을 했더군요. 민주란의 피부조직이나 혈흔은 아니었습니다. 보초서던 놈들의 전과를 조회해보니 그중 채규팔이라는 놈이 이전에 강간치상으로 복역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 기록을 뒤져보니까 당시 피해 여성의 질에서 채취한 정액에서 DNA 검사를 해놓은 것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도 녀석은 범행사실을 부인했지만 DNA 검사결과 때문에 빠져나올 수 없었습니다. 민주란의 손톱에서 나온 피부조직과 혈흔의 DNA와 이전 채규필의 강간치상 사건에서의 DNA가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그 정도면 소명자료가 충분하니 채규팔에 대해 체포영장을 청구하십시요, 그리고 2대의 차량에 대해서도 압수수색영장을 신청하시고, 보안은 철저히 유지하십시요”

“네, 검사님”

 

“아, 그리고 이 옥구슬을 한 번 보십시요. 민주란이 죽어가면서도 움켜쥐고 있었다고 하던데, 혹시 어디에 사용하는 물건인지 아시겠습니까?” 내가 차도연으로부 받은 옥구슬을 보여주며 물었다.

“글쎄요, 크기로 보아서는 목걸이나 반지에 사용하긴 어려울 것 같고,,, 놀이개나 장식품이 아닐까요, 이 옥은 J시에 있는 옥광산에서만 나는 옥입니다. 옥광산 개발업체는 ‘연옥’이라는 회사입니다. 제가 이전에 그 옥광산을 조사해본 적이 있어서 아는데요, 우리나라에서 이런 옥이 나는 곳은 거기 밖에 없습니다.”

“아, 그래요, 그렇다면 옥을 가공하는 곳이 따로 있습니까?”

“J시에 있는 옥광산 회사에서 직접 주문을 받아 옥을 가공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외 따로 가공업체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옥구슬을 가져가서 한번 알아보십시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여왕벌에 건장한 녀석들이 옥구슬을 찾으러 드나들었다던데 그에 대해서도 조사해보시구요”

“네, 검사님”

홍반장은 옥구슬을 들고 돌아갔다.

 

시행사 ME라면 상민이가 운영하는 회사가 아닌가?, 홍반장에게는 말하지 못했지만 승용차가 ME에서 리스받은 차량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적지않게 놀랐었다.

곧바로 상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민이가?, 내다”

“야, 니 오랜마이네(오랜만이네), 영감님되더니 우리하고는 소식도 끊은 줄 알았다 아이가”

“그럴리가 있겠나,,,연락 못한 건 미안하데이, 오늘 저녁 시간되나?”

“오늘?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나?, 급한 일이 아니래도 만사 제쳐놓고 가야지, 니는 바쁠테이 내가 내려가마”

“그래주면 고맙고, 그럼 저녁에 보자”

그날 저녁 J시 외곽의 한적한 매운탕집에서 상민이를 만났다.

“사업을 잘 되나?” 내가 반가워하며 먼저 물었다. 오랜만에 보는 상민이는 촌티를 깔끔하게 벗고 얼굴엔 여유로운 기름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런 것들이 나이보다 훨씬 노회해 보이게 했는데 회사 사장 자리가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만드는 것 같았다.

“덕분에 잘 나가고 있다 아이가”

“네가 운영하는 회사가 ME가 맞제(맞지)”

“맞는데 그건 와(왜)? 우리 회사에 문제 있나?”

“자슥이, 회사 이름도 못물어보나, 그런데 니 봉황건설하고 무슨 관련 있나?”

“그건 또 와?” 상민은 문득 표정이 굳어지며 반문했다.

“그래, 니한테 뭐할라고 돌려 이야기하겠노, 내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마, 니 회사에서 리스받은 차량을 봉황건설에 빌려준 적 있나?”

상민은 잠시 침묵하다가 숨겨보아야 소용없다고 판단한 듯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마 5년전일 끼다(것이다), 우연한 자리에서 장학모 회장을 만났다 아이가, 장회장이 대밭골 어쩌구 하는 이야기를 하기에 자세히 물어보이 우리 마을 출신이데, 그 후로 고향 후배라고 마이(많이) 챙겨주더구나, 물론 사업적으로도 도움을 마이 받았다, 우리 회사가 이만큼 큰 건 다 장학모 덕분이제”


“우리 어릴 때 기억나나, 왜 논에 헬리콥터가 내려앉고, 그 때 별단 군인이 내렸잖아, 그 때 별 2개가 장학모다” 내가 어릴 적 기억을 상기시켜보았다. 

“그건 기억이 안나고... 장학모는 어릴 때 고향을 떠나 자수성가한 사람으로만 알고 있다, 우리 아버지한테도 물어보이 어렴풋이 기억하는데 고아로 이집저집 다니면서 비렁뱅이나 다름없이 지내다가 마을을 떠났다카데, 그 후론 마을 사람들 기억속에서도 잊혀져 갔고, 장학모도 성공했지만 고향엔 그리 애착이 없는 것 같더라, 마을 사람들도 해준기 없으이 대놓고 욕하지도 못하고, 노인들 빼고는 장학모가 우리 동네 출신인지도 잘 모르고 있더구만, 장학모와 친한 주변사람들한테 들은 이야기로는 6.25 때 어느 미군장교가 구걸하는 장학모를 거두어서 그 밑에서 심부름을 시켰다카데, 그 미군장교가 영어도 가르쳐 주고, 학교도 보내주고 했단다, 그 때 익힌 영어실력 덕에 나중에 통역장교로 특채되었다고 안하나, 5.16때 줄을 잘 잡아서 그 때부터 지금까지 쭉 출세한 거고” 상민이 장학모와 자신이 특별한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랑스럽게 말했다.


“차량은 왜 빌려주었노, 봉황건설에서 구입해도 되는 거 아이가”

“글쎄 그 이유는 잘 모르겠고, 장학모 비서가 부탁하데, 우리 입장에서 거부하기도 어렵고 또 봉황건설에서 리스비를 떼어먹을 일도 없을테고, 그기 무슨 죄가 되나?”

“아니 그런 건 아이고.... 장학모 별장은 아나?”

“가보진 못했고 이야기는 들었다, 주로 높은 사람들 접대할 때 이용한다고만 알고 있다, 장학모가 큰 잘못이라도 저질렀나, 꼬치꼬치 캐묻는 기 수상한데”

“아이다 마, 아직은 자세히 말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라서,,,그래만 알아라, 때 되면 말해주꾸마(말해줄게)”

“알았다, 말조심은 여전하구만, 그건 그렇고 니 숙희 소식 아나?”

“숙희? 연락 안된지 오래됐는데, 숙희가 와?”

“숙희가 입국했다카데”

“그래, 아주 나온 기가”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파리에서 정식교수가 된 건 알제, 6개월간 안식년이라 들어왔다 카더라, 나도 얼마전에 고향에 갔다가 우연히 숙희를 만났다 아이가”

“지금 고향에 있나?”

“아니, 서울에 있는 대학에 연구원 신분으로 있는 것 같더라. 대밭골엔 잠시 들른 거고, 니 연락처 좀 알려달라케서(알려달라고 해서) 알려줬다, 조만간 니한테 연락이 가제 싶다.(갈 것 같다)”

나는 상민이 자신이 술값을 낼테니 2차로 좋은 술집에 가서 회포를 풀자는 것을 겨우 뿌리칠 수 있었다. “조만한 서울에 갈 일이 있으니 그 때 진하게 한잔 사라”고 하고서는 숙소로 돌아왔다.

 

이제야 진실의 서막이 조금씩 올라가고 있는 것 같았다. 민주란과 민영주는 장학모와 모종의 관계가 있다. 그리고 장학모는 민주란의 죽음에 깊숙히 개입되어 있다. 조직폭력배와 상민의 회사는 장학모가 꾸민 시나리오의 일부일 뿐이다. 막이 오르고 극이 더 진행되어 봐야 알겠지만 점점 암흑의 핵심으로 치닫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런데 숙희가 돌아왔다니, 숙희,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 한켠이 서늘하고 숨이 막혔었다. 숙희는 파리에서 너를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편지를 내게 보내왔고, 그 이후로 나는 숙희에 대한 미련을 깨끗이 접었었다. 상민의 입을 통해 숙희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잠자고 있던 연정이 뭉클 솟아나는 건 왜일까? 숙희를 완전히 지운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민주란의 수수께께를 풀고 있는 와중에도 사사로운 감정이 솟구치다니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살아있다는 건 끝까지 구차함을 동반한다는 것과 같은 말인가. 숙소로 돌아와 불을 켜자 책상위에 놓인 사진이 오랜만에 눈에 들어왔다. 탁수나무 아래에서 숙희가 해맑게 웃고 있다. 600년 묵은 아름드리 탁수나무는 인간사 100년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숙희와 함께 미소를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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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awm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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