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신기루

 

     1. 돌아온 옥구슬

 

하지가 가까워오는 6월의 여름 밤은 유난히 짧았다. 낮에는 매일 새롭게 벌어지는 사건더미에 치이고, 짧은 밤시간에야 겨우 시간을 내 민영주의 비망록을 정리할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선 부장에게 사건배당을 줄여달라고 부탁하고 민주란의 사건에만 몰두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 중요사건이라고 보고할 정도의 실체도 드러나지 않았고, 달리 뾰족하게 내세울 만한 명분도 없어서 개인적인 욕심을 앞세울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쌓여가는 기록을 마냥 방치할 수만도 없었다. 검찰 사무 전체로 보자면 민주란의 사망사건은 수많은 변사사건중 하나였을 뿐이다. 당분간은 밤을 낮삼아 두마리 토끼를 쫒는 수밖에 없었다.

 

민영주의 비망록은 휘영각에서 장학모를 처음 접대한 이후로는(그것이 한 일년 전쯤이다)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가끔씩 기도문구나 뜻모를 낙서와 그림들로 채워져 있었다. 일어난 일들을 완성된 문장으로 그대로 재생하기엔 난감한 사정이 있었을까. 낙서나 그림이 더 많은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마지막 페이지에(그것이 민주란의 사망 1주일 전이다) ‘운명의 날’, ‘언니 고마워’ 라고 아무렇게나 적은 짧은 문구가 무언가를 암시하고 있는 듯 하다는 것 외에 나머지는 난해한 암호와도 같았다. ‘민주란은 왜, 어떤 경위로 민영주의 비망록을 보관하게 된 것일까?’라는 의문만 더 커졌다. 민주란이 사망하기 1주일 전쯤 민영주의 비망록을 건네받았다면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에 적힌 내용으로 미루어 적어도 두 사람은 그 이전에 만났을 터이고, 둘 사이에 무언가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사진출처 http://happist.com/zbxe/

 

그런데 문득 ‘왜 민주란이 민영주의 비망록을 보관하고 있었다고만 단정하고 있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이 일란성 쌍둥이라면, 두 사람이 일반인들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닮았다면 서로 역할을 바꾸어 잠시 살았을 수도 있지 않은가. 왕자와 거지처럼 말이다. 허황된 망상이라고 도리질을 하다가 꼭 그렇지 만도 않을 것 같았다. 여왕벌에서 일했던 사람은 민주란이 아니라 민영주라고 가정한다면 민박집에 투숙한 사람도 민영주일 것이다. 그러면 민주란은 민박집에서 나와 사망한 것이 아니라 민영주와는 별개의 사건에 휘말렸던 것이 된다. 애초에 한사람이 아니라 두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서 함께 존재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불현듯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민주란의 혈액검사에서 음주수치가 나오지 않았던 점, 길도 좋지 않은 곳을 칠흑같은 어둠을 뚫고 걸어가기엔(승용차는 민박집 앞에 있었고 차키도 민박집에 그대로 있었다. 택시도 지나다니지 않는 곳이므로 차량을 이용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추락지점이 민박집에서 꽤 먼 거리인 점, 여왕벌 유흥주점에서 일하기엔 민주란 보다는 민영주가 더 어울려 보이는 점(목포에서 공장을 운영하던 사람과 요정과 흡사한 한정식 집에서 일한 경력의 사람을 비교해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등은 두사람이 추락지점과 민박집에 각각 따로 있었다고 가정할 때 설명이 더 용이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가정은 우선 여왕벌 아가씨들이 민주란의 시신을 민영주로 착각했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두 사람은 쌍둥이이고, 물에 빠져 몸의 붓기가 진행되고 있었을 것이므로 아가씨들로선 충격적인 상황에서 얼마든지 착각할 수 있었을게다. 아무튼 여왕벌 아가씨들을 불러 다시 한번 물어보아야 겠다. 휘영각 사람들도 조사할 필요도 있고. 궁극적으로는 민영주의 행방을 찾아야 한다. 또 한가자기 민영주의 비망록중 사춘기 소녀시절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들을 제외하고, 가장 최근 어떤 남자로부터 받은 편지 하나가 끼어 있었다. 그것을 그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건 아니다, 정말 아니다.

돈 몇 푼에 싸구려 웃음을 팔고, 비굴하게 0000를 팔고... 나의 여인이 만인의 연인으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정말 참을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너에게 빌붙어 사는 기둥서방이 아닌 이상 말이다.

너의 몸이 탐욕스런 눈길의 대상이 되는 것, 너 또한 행운을 낚기 위한 유혹의 수단으로 너의 몸을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것, 그리하여 너는 은연중 너의 몸을 무기로 도발을 즐기고 있는 것이 아니냐, 너의 몸은 언제든 살 수 있는, 적어도 언제든 그런 가능성이 열려있는 상품이고, 남정네들이 너에게 던지는 추파에 너의 존재감마저 느끼는 것이 아니더냐, 결국 그것이 0000를 파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더냐.

 

나는 그런 네가 싫다, 아니 그런 너를 보면서도 속수무책이어야 하는 내가 정말 싫다. 그러면서도 너의 그런 행위에 노심초사해야 하는 내가 너무나도 싫은 것이다. 물론 너는 나의 여인도 아니고, 나의 간절한 구애에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따라서 나는 너에게 간섭할 아무런 자격이 없다고 강변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너는 나의 평화로운 영역을 침범했고, 그것이 의도되었던 그렇지 않았던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남의 집인줄 모르고 들어갔더라도 잠시나마 그 가정의 평온을 깼다면 그 책임을 져야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나는 너에게 그 만큼의 자격은 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이 편지를 쓰는 것이다.


아!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나는 파멸할 것이다. 육체도 영혼도 산산히 부서질 것이다. 낭떨어지를 향해 서서히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 조만간 천길 낭떨어지 아래로 추락할 것이 예정된 운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 속으로만 피하려 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 이젠 알 수 있을 것 같다. 피할 수 없다면 거대한 운명의 파도에 나를 맡기는 수밖에...., 운명의 품속으로 거침없이 뛰어드는 수밖에....


하여 나는 떠나고자 한다, 내가 너를 볼 수 없는 곳으로, 너의 눈에 내가 띄지 않는 곳으로, 내가 너로 인해 인생의 모든 유용한 가치를 버리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너 또한 바라지 않을 것이다.

 

결국 너는 고래의 다른 여인들처럼 무방비상태에서의 뜻밖의 일격에, 때로는 너 스스로의 실수를 가장한 의도된 도발에, 끊임없는 거짓 사랑의 공세에 서서히 무너져내릴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자포자기의 상태에서 00의 길로 들어설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너의 곁에 있다고 하여 막을 수도 없고, 너 또한 막을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는 하늘 꼭대기에서 아슬아슬한 외줄줄타기를 하고 있고, 짜릿함을 만끽하며 그것을 즐기고 있다. 줄을 타고 끝까지 가던지 중도에 떨어지던지 둘중 하나만이 너의 앞에 놓여졌을 뿐 다른 대안은 없다.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는 곳으로, 아무도 따라 갈 수 없는 거대한 동굴 속으로 너는 들어갔다. 다시는 나오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잃는 것은 나의 반쪽을 도려내는 것과 같은 고통이다.

 

그것이 내가 너를 선택한 것에 대한, 금단의 열매에 손을 덴 것에 대한 하늘의 벌이라면 감수해야겠지.


아무튼 너는..... 미친 열기가 너의 사위를 애워싸고, 헛된 무지개를 잡으려는 안쓰러운 몸짓은 서서히 지쳐가고 있다. 퀭한 눈동자는 어두움을 뿜어내고 있다. ‘너 가지고는 결코 채울 수 없어’라고 조롱하듯이. 그렇지만 너는 네 모습이 어떤지 보지 않는다. 너의 가식적인 웃음은, 그러나 그 뒤에 감쳐진 슬픔은 ‘세월의 강물에 실려갈 뿐 아무 것도 보지 않을거야’라고 말한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그래서 내가 걸림돌이 된 것일까.

 

떠나라, 너에게 묶어 두었던 나의 줄을 놓아 주마, 줄곧 사랑으로만 알았던 그러나 이제 너에겐 귀찮기 짝이 없는 집착이 되어버린.... 언제까지나 칭칭 동여매여 있을 줄 알았던 너와 나 사이의 굵디 굵은 동아줄을 끊자. 자유의 세상에서 마음껏 너를 풀어놓고 너의 인생 속을 부유하거라.


                                                                  세차게 쏟아지는 빗속에서

                                                                 언제나 너를 사랑하는 경삼』


민영주의 비망록에서 편지속의 주인공으로 보이는 경삼에 대해 언급된 바는 없다. 절제되지 않은 감정을 두서없이 그대로 드러낸 것을 보면(중간중간 지나친 표현이다 싶은 곳에 동그라미로 대신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리고 연모의 정을 비장하게 스스로 포기한 것을 보면(적어도 편지를 쓸 때의 각오로는) 민영주에게 어떤 급박하거나 충격적인 일이 있었던 듯 싶기도 하다. 골똘히 생각에 생각을 이어가는 동안 벌써 날이 훤히 밝았다.

 

                      사진출처 http://blog.joinsmsn.com/media/folderListSlide.asp?uid=dohihahn&folder=12&list_id=9888754



출근하자 마자 여왕벌 아가씨들에게 연락해서 검사실에 다녀갈 것을 요청하였다. 오후에 차도영만 검사실로 들어왔다. 20대 초반의 앳된 얼굴이다. 내가 집무실로 따로 불렀다.

“지금도 여왕벌에서 일하고 있나요.” 먼저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려고 그녀의 근황부터 물었다.

그런데 차도영은 검사실에 들어올 때부터 잔뜩 주늑이 들어 불안한 눈길을 감추지 못했고, 내 앞에 앉아서도 눈길 한번 마주치지 않았다. 고개를 떨군채 나의 물음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미동도 하지 않더니 잠시 후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민주란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아 그러려니 생각했다.

“몸이 많이 좋지 않으가 보군요, 불편하면 다른 날 와도 되요.”

“검사님, 죄송해요” 엉뚱하게도 차도영은 용서를 빌고 있다.

“뭐가 죄송하다는 거죠”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내가 물었다.

“사실은 제가 가져갔어요.”

순간 나는 차도영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차도영은 그것이 발각되어 부른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자 흥분은 가라앉히고 차분히 이야기하세요, 미리 말하면 법에서도 선처라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의아한 표정을 바꾸어 짐짓 다 알고 있다는 듯 태연하게 물었다.

차도영은 주머니에서 물건 하나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연두색 빛깔의 옥으로 만든 구슬이었는데, 목걸이 알로 사용하기엔 너무 크고, 새알 모양의 장식품이라고 보기엔 작았다. 나는 차도영이 스스로 말할 때까지 침착하게 기다렸다.

“그날 주란 언니의 시신이 발견되었을 때 119가 먼저 시신을 건져내 강가에 눕혀놓았더랬습니다. 자세히 보니 오른손을 꼭 쥐고 있더라구요, 모두들 이미 사망한 것을 확인하고 경찰들이 오기를 기다리던 중에 제가 어수선한 틈을 타서 손을 펴 보니 옥구슬이 있었습니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집어갔어요, 잘못했어요, 검사님”

“그런데 왜 지금에서야 그런 말을 하는 거지요” 내가 말투를 바꾸어 약간 위압적으로 물었다.

“이걸 찾느라고 건장한 사내들이 여러 차례 업소에 드나들었어요, 그 때 현장에 있었던 아가씨들중 한명이 가져가는 걸 보았다나봐요. 영업장과 숙소를 샅샅이 뒤지고 난리가 아니었어요, 몸수색도 당하고요. 조만간 끌려갈지도 몰라요. 마침 검사님이 부르시기에 이것 때문인줄 알고 오늘 이렇게 가져왔어요”

“왜 건장한 사내들이 옥구슬을 찾는다고 하던가요?”

“잘 모르겠어요, 자기들한테는 굉장이 중요한 거니까 그렇게 찾지 않았을까요”

“자 그건 그렇고, 강변에서 보았던 사람이 여왕벌에서 일하던 마담이 틀림없나요” 내가 화제를 돌려 부드럽게 물어보았다.

“네, 제 기억으론 그래요.”

현장과 병원에서 촬영한 민주란의 사진 몇장을 보여주었다.

“잘 봐요, 얼굴만 보지 말고, 옷이나 다른 부분도”

차도영은 갑작스런 질문에 의아해하는 듯 하면서도 사진을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아, 이제보니 바지가 조금 이상한데요, 언니가 입던 청바지는 상표가 돌체가바나였거든요, 바지 뒤주머니 쪽에 상표가 붙어 있는데 그 상표가 안보이네요, 제가 청바지에 관심이 많아서 잘 아는데 사진 속 청바지는 일반 싸구려 청바지 같은데요, 상의는 잘 기억이 안나구요”

“그 외에는요?”

“언니랑 목욕탕에 자주 갔거든요, 언니 등을 밀러줘봐서 아는데 이런 점은 없었어요” 차도영은 다시 사진을 한장 한장 넘겨다가가 혼자말처럼 말랬다.  

“틀림없나요”

“네.... 그럼 죽은 사람이 마담 언니가 아니란 말인가요”

“옥구슬을 찾았다던 건장한 사내들이 그런 말을 하지 않던가”

“그런 말은 못들었어요, 아! 얼핏 생각나는데 언니가 발견된 곳엔 왜 있어냐고 묻기에, 민박집에 같이 놀러갔다가 변을 당한거라’고 했더니 놀라는 눈치였어요.”

“건장한 사내들이 누군지 알고 있나요”

“지배인 아저씨과는 원래 안면이 있는 것 같았어요, 그 이상은 저도 몰라요”

“오늘 있었던 일들은 절대 말하지 말고, 당분간 여왕벌을 그만두면 의심할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고요, 또 무슨 일이 있으면 곧바로 저한테 연락하시고....”

"네, 알겠어요, 검사님, 그런데 저는 어떤 처벌을 받나요"

"글쎄요, 미리 용서를 구했으니 큰 처벌은 없을 겁니다, 처벌하지않을 수도 있고..."

"고맙습니다, 검사님"  차도영은 조금 안심한 듯 하면서 돌아갔다. 

 

여왕벌 마담이고 민박집에 투숙했던 사람은 민주란이 아니라 민영주가 틀림없다. 민주란은 민박집에 있다가 나간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추락지점 부근에 있었고, 민영주는 민박집에 있었다. 그런데 민주란은 사망했고, 민영주는 사라졌다. 옥구슬은 민주란이 죽어가면서도 움켜쥐고 있었고, 누군가 애타게 찾고 있는 것을 보면 민주란의 죽음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특별하지도 않은 옥구슬에 무슨 비밀이 숨어 있는 것인가. 건장한 사내들은 누구이고, 여왕벌 아가씨중 한명이 옥구슬을 가져갔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책상 위의 푸른 옥구슬이 불빛에 반짝거린다. 자꾸만 신기루가 내 눈을 홀리고 있는 것만 같다.

Posted by lawm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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