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목포 아리랑

 

나는 상민을 만나고 온 다음날 하루종일 홍반장이 놓고간 기록을 샅샅이 검토했다. 홍반장이 구두로 보고했던 사건현장 부근의 당일 상황, 국과수에서 보내온 민주란의 부검결과, 목포에 내려가 민주란과 관련된 사람들을 직접 조사한 내용 등이 사진, 진술조서, 수사보고서 형태로 꽤 방대하게 잘 정리되어 있었다. 홍반장은 역시 베테랑 수사관이다. 수사기록만 보아도 홍반장이 이 사건에 얼마나 혼신의 힘을 쏟고 있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여러 사람들의 진술을 토대로 민주란의 행적을 재구성해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는 각 사람들의 진술별로 무미건조하기는 하나 조서내용 그대로 정리해 보았다.

 

<천만호의 진술>

○ 저는 목포 북항 근처에 있는 ‘에스페란짜’(스페인어, 우리말로 ‘희망’)라는 회사의 공장장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주로 굴비를 저장, 가공, 유통하는 회사입니다. 사장님 이름은 민주란으로 회사는 개인사업자로 등록되어 있고, 설립된지는 약 3년쯤 됩니다. 회사 이름은 사장님이 직접 지으신 건데 모두들 수산물 가공 회사 이름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반대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 독특한 이름 때문에 더 유명해졌습니다. 물론 매출도 많이 올랐구요.

 

○ 사장님과 저는 그 전에 굴비 가공 공장에서 약 2년간 근로자로 함께 일했고, 저는 약 20년전부터 같은 일을 해오고 있습니다만 사장님은 이 일은 처음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굴비를 가공하는 방법은 참조기를 얼렸다가 해동한 다음 크기별로 선별하는 작업, 비늘제거, 세척, 염장, 건조, 포장 등의 단계로 이루어지는데 이전에는 아주머니들의 오랜 경험과 감각에 의존한 손작업으로만 이루어졌고, 비위생적인 부분이 많았습니다. 사장님은 아주머니들이 쌓아온 노하우를 토대로 기계작업을 도입하여 분업체계 및 위생적인 작업환경을 만들었습니다. 사장님은 굴비공장에서 막일꾼으로 시작했지만 전과정을 착실히 익혔습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저나 아주머니들에게 늘 묻고 기록하고는 했습니다. 나이 어린 사람들은 이런 곳에서 일하지 않으려고 하는 추세라 저희도 참 의아했습니다. 사장님은 젊고 학식도 있어서 손쉽게 할 수 있는 다른 일도 많을텐데 굳이 이런 험한 작업에 직접 뛰어들었는지 말들이 많았고, ‘이러다 금방 떠나겠지’라고들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장님은 날이 갈 수록 작업장에서는 더욱 열성적으로 일했습니다. 저희들이 미처 알지 못하였거나 알았더라도 타성에 젖어 당연하게 여겼던 부분들에 대해 ‘아 그렇게 하면 될 것을’ 하고 무릎을 칠만한 아이디어를 많이 제안하셨습니다. 또 작업장에서 일하는 시간 외에 틈만 나면 항구나 공판장에 나가 조기를 잡는 방법, 선주와 선장과의 관계, 경매과정, 유통구조 등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선장이나 도매상들과도 친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쪽 사람들이 배타적인 경향이 강해서 외지인들한테는 정보를 잘 안알려주는데 그들의 도움으로 사장님이 조기배에 투자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때 작은 돈으로 상당한 수익을 냈고, 그 돈을 밑천으로 여러 차례 투자금을 늘려가면서 상당한 돈을 벌었습니다. 역시 배운 사람이 다르긴 다르더군요. 저희는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들이라 ‘일당이나 좀 오르지 않나, 어떻게 하면 편하게 일할까’ 뭐 그런 쪽으로만 생각이 굳어있거든요. 생각해보면 평생 하층 계급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어도 벗어날 생각은 못하고 팔자려니 체념하고 사는 한심한 인생들이지요. 저희는 사장님이 조기배에 투자해서 돈을 많이 벌었으니 이곳을 떠나거나 이 일을 그만두고 투자자로만 남아있을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사장님은 이번에는 직접 조기배를 구입하고, 선장을 고용해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그 후 냉동창고도 구비하고 기계설비도 직접 개량해서 현재의 공장을 일구어냈습니다. 현재 20여명의 근로자가 있는데 젊은 사장이라 시기도 많았고 보지 않는 곳에서는 험담도 많이 했습니다. 어려움이 있었지만 사장님은 개의치 않았고 항상 밝고 친절한 모습으로 저희들을 대해주었습니다. 모든 근로자가 주주가 되는 회사를 만들어보자고 하면서 독려했습니다. 하루하루 지나면서 저희들도 사장님의 진심을 믿게 되었고, 지금은 가족보다 더 신뢰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 제가 사장님한테 직접 들었는지 전해들은 것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테 사장님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 칠레로 건너가 상당기간 사셨다고 합니다. 어떤 이유로 한국에, 그것도 목포로 왔는지는 모르나 처음 목포에 오셨을 때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는데 바닷가를 산책하다가 항구의 활기찬 광경을 보고 새로운 삶의 희망을 얻었다고 합니다. 희망을 준 곳에서 뿌리를 내리리라 결심하고 이곳에 정착하게 된거라고 했습니다.

 

○ 사장님에게는 아들이 한명 있는데 이름이 장준영이고, 현재 일곱살쯤 되었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산에서 사고를 당했다고 하고, 사장님은 다시는 애비 없는 자식을 만들지 않기 위해 위험한 산행은 그만 두었다고 합니다. 6개월 전쯤 서울 누군가에게 준영이를 맡겼다고 했는데 사장님은 준영이를 데리러 간다고 하면서 공장은 저에게 맡기고 서울로 갔습니다. 금방 올 줄 알았는데 그 후 무슨 일인지 계속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사장님이 자세한 말씀은 안하셔서 잘 모르겠고, 전화상으로만 좀 늦어지겠다고 한 것이 6개월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뒤늦게 사장님이 변을 당하였다고 하니 참담한 심정입니다. 이곳 공장은 어찌해야 될지도 난감하구요. 



<염정숙의 진술>

○ 저는 목포 하당에 있는 유달 유치원 교사입니다. 민주란씨 아들 장준영이 저희 유치원원생이었습니다. 참 똑똑하고 밝은 아이였습니다. 준영이는 아버지가 안계신 것으로 알고 있고, 민주란씨는 편모슬하의 준영이를 엄하게 훈육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요즘 엄마들같이 응석받이로 키우지 않고, 강하고 독립심이 강한 아이로 자라기를 바랬던 것 같습니다.

 

○ 준영이 집에서 유치원까지는 걸어서 약 20분 정도 거리인데 준영이는 일곱살 때부터는 어른들 도움없이 혼자 등원했다가 혼자 하원하고는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준영이는 요즘 아이 답지 않게 씩씩하고 친구들 사이에서 의리가 있었습니다. 준영이는 6개월 전부터 유치원에 나오지 않아 알아보니 서울 친척집에 가있다고 하였고, 그 후로는 어찌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희는 민주란씨가 아이와 함께 아예 서울로 이사한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김중술의 진술>

○ 저는 목포 북항 수산물 공판장에서 경매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7년전쯤 이었을 것입니다. 밤에 동료들과 술을 한잔 마시고 집으로 가던중 어두운 골목에서 어떤 여자가 배를 움켜쥐고 쓰러져 있더군요, 보니까 임산부로 보였고, 얼른 택시에 태워 병원에 데려갔습니다. 얼마후 그 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요. 그 여자가 민주란이고, 아이는 장준영입니다. 당시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다고 하더군요. 어떤 정신적 충격을 받아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고, 며칠 동안 잘 먹지도 못해 몸이 많이 쇠약해 있었다고 했습니다.

 

○ 그 후 민주란은 저를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고 가끔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러다가 목포에 정착하고 싶은데 바다와 관련된 일이면 아무 일이라도 좋으니 할 수 있는 일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곱게 생긴 아가씨였는데 힘들거라고 만류했지만 기왕 바닷가 도시에 정착할 거면 바다와 관련된 일을 해보겠다고 떼를 쓰다싶이 했습니다. 저는 ‘순간적인 감상에 젖어 그럴 거야, 그래 얼마나 힘든지 한 번 해봐라, 현실이 그리 녹록치 않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될거다’라고 생각하면서 굴비공장에서 일하도록 주선해주었습니다. 그런데 민주란은 예상과 달리 어촌의 허드레 일을 잘 견뎌냈습니다. 정말 이곳에서 살아보려고, 이곳 사람이 되려고 무던히도 애썼던 것 같습니다. 또 호기심이 많은 아가씨였는데 자주 저를 찾아와 어류를 경매하는 과정이며, 누가 경매에 참여하는지, 앞으로 이쪽 시장은 어떨 것인지 등 이것저것 세세하게 물었습니다. 저는 죽다 살아난 아가씨가 다시 살아보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에 감동해서 제가 아는 모든 것들을 알려주었습니다. 민주란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그 때부터 나름대로 치말하게 미래를 생각했었던가 봅니다. 결국 선주가 되너니 떡하니 어류가공 공장까지 차리더군요. 참 대단한 여자입니다. 저도 제 친딸이 성공한 것처럼 뿌듯하기도 하구요.

 

○ 바닷가 남자들이 좀 거칩니까. 주변에서 추근덕거리는 사내들이 많았지만 이질감을 주지 않고 그네들과 동화되는 듯 하면서도 감히 넘볼 수 없게 하는 마력이 있는 것 같더군요. 이제는 모두들 민주란에 대해 친한 동료나 훌륭한 사업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부터 보이지 않아 걱정들이 많았는데 객사했다니 정말 안타깝습니다. 하늘에서라도 편히 쉬기를 바랍니다.


<김말자의 진술>

○ 저는 민주란씨 댁에서 최근까지 5년간 입주 파출부로 일했습니다. 파출부 일이라야 다 그렇겠지만 주로 집안 일을 돕거나 민주란씨 아들 장준영이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함께 놀아주었습니다. 민주란은 장준영이 6살 때부터는 혼자 등원하고 귀가하도록 교육했습니다. 6개월 전쯤 준영이가 올 시간이 지났는데도 유치원에서 오지 않아 알아보니 유치원에서는 벌써 귀가시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민주란씨에게 연락해보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얼마후 민주란씨도 준영이를 데리러 간다고 서울로 갔습니다. 그런데 민주란씨는 돌아오지 않았고, 전화로만 ‘시일이 걸릴 것 같으니 다른 곳에 일자리를 찾아보라’고 하더군요. 지금은 민주란씨 댁을 나와 다른 곳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 민주란씨는 저와 오랫 동안 한집에서 지내다보니 평소 저를 언니로 생각하고 자주는 아니어도 속에 있는 말을 스스럼없이 꺼내기도 했습니다. 민주란도 그 나이치고는 꽤나 고단하고 힘든 삶을 살았더군요. 결혼을 약속한 남자가 히말라야 어느 산에 갔다고 했는데 그 때 그녀는 임신 3개월째였다고 합니다. 예감이 좋지 않아 남자에게 임신한 사실은 말하지 못하고 ‘이번에는 가지 말고 옆에 있어달라’고 했다는데 남자는 기어코 떠났다고 합니다. 결국 남자는 눈더미에 실종되었고, 민주란은 칠레에서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민주란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쌍둥이 동생이 부산의 보육원에 있으니 기회가 되면 찾아보라고 했다더군요. 한국에 와서 수소문해보니 보육원에서도 연락이 끊긴지 오래되었다고 하더랍니다.

 

○ 민주란과 결혼을 약속했던 남자는 봉황그룹 회장의 아들이었다고 합니다. 한국에 온 것도 사실은 그 회장을 만나려는 것이 주목적이었지요. 경제적인 도움을 받으려는 것도 아니고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달라고 하려는 것도 아니었다고 하더군요. 뱃속 아이가 태어나면 유복자가 될텐데 할아버지가 될 분한테는 알려야 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봉황그룹 회장은 비서를 통해 민주란의 방문 목적을 전해 듣고도 만나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회장 비서가 잠시 조용한 커피숍으로 불러 병원비라며 봉투를 꺼내놓더랍니다. 비서는 그러면서 ‘회장과 아들과의 인연은 일찌감치 끝났다, 또 뱃속의 아이가 회장의 손자인지 어떻게 아느냐, 다만 당신이 회장 아들과 어떤 연이 있었던 것은 알겠다, 회장님이 특별히 배려한 것이니 아이를 떼라, 만약 계속 문제를 삼는다면 당신에게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마치 회장 아들을 미끼로 한몫 챙기려는 협박범으로 여기는 것 같더라더군요. 그래서 봉투를 집어던지고 미련없이 돌아섰다고 합니다. ‘당신들이 걱정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니 안심해도 된다. 오히려 내가 부탁하건데 나중에라도 우리를 찾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고 하면서요. 그렇게 민주란은 비참한 꼴을 당하고 생모를 찾았다고 합니다. 뱃속의 아이는 커가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기도 했겠지요. 하지만 아이를 지워야 겠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어렵사리 생모가 사는 곳을 알아내어 찾아가 먼발치에서 사는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생모는 오래전에 다른 남자와 가정을 이루고 그 남자와의 사이에 아이들을 낳아 잘 살고 있더랍니다. 생모의 얼굴에서 기쁨과 행복이 넘쳐나는 것을 보았고, 그 길로 생모와의 해후도 포기했다고 합니다.

 

○ 세상에서 버림받은 심정으로 갈 곳 잃은 나그네처럼 서울거리를 배회하다가 무작정 기차를 탔는데 내린 곳이 목포라고 하더군요. 목포에서 멍하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길가에 쓰러졌었는데 김중술씨의 도움으로 응급실에서 가까스로 살아났고, 아이도 무사히 낳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후 목포에 둥지를 틀었고, 한평생 아이를 위해 살기로 다짐했다고 합니다. 사업도 번창했고 이곳 사회의 일원이 되어 살면서 불행했던 과거도 어느 정도 치유가 되었다고 하구요.

 

○ 그런데 어떻게 알아냈는지 봉황그룹 회장이 사람을 시켜서 아이를 달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뒷조사를 했을 것이구요. 민주란이 오뚜기처럼 일어나 열심히 살고 있고, 아이도 바르게 자라고 있는 것을 보고 아이가 탐이 났던 것이지요. 혈육이나 후계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고도 보이구요. 물론 민주란은 일언지하에 거절했지요. 워낙 완강하니까 정상적인 방법으로 힘들겠다고 생각했는지 얼마 후에 유치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아이를 납치해간 것입니다. 납치나 유괴로 신고될 것을 우려했는지 민주란에게는 데려가 잘 키울테니 염려하지 말라는 쪽지를 남겼다고 하더군요. 민주란도 설마 그렇게까지 할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해서 방심했던 것이지요. 민주란은 준영이를 데려오기 위해 서울로 회장을 만나러 갔던 것입니다. 고소나 소송으로 해결하려고도 했지만 혹시나 준영이에게 안좋은 일이라도 생길까봐 어떻게든 대화로 풀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게 되자 계속 서울에 머물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런 사고사 발생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꼭 민주란의 억울한 한을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이로써 민주란의 귀국후 행적은 어느 정도 그 의문점이 해소될 수 있었다. 민주란은 장민수와는 결혼약속까지 했고, 그의 아이까지 가진 상태에서 서울로 왔던 것이다. 아이의 유일한 혈육인 장학모를 만나 죽은 장민수와의 화해를 시도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장학모는 매정하게도 민주란을 내쳤고,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고독과 절망의 끝에서 찾아든 목포는 새로운 희망의 씨앗을 심을 수 있도록 민주란을 위무해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민주란의 귀국후의 삶은 자신을 버린 생모와는 같지 않으려는 처절한 몸부림의 연속이었을 것이고, 장민수를 잃은 빈 자리엔 아이에 대한 사랑과 열망으로 채워졌을 것이다. 그런데 그 희망의 노래를 채 부르기도 전에 이를 시기하는 악마가 나타났던 것이다. 기록의 행간 곳곳에서 민주란의 좌절과 고통, 꿈과 의지를 고스란히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악마를 자처하고 있는 장학모에 대한 분노의 불길이 타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민주란의 짧은 평화를 가로챈 검은 손길을 잘라야 한다고 다짐했다. 휘영각에서 민영주가 만났던 장학모, 민주란의 아들 장준영의 할아버지인 장학모, 한 때 나의 선망이기도 했던 장학모. 모두가 한사람이면서 모두가 하나의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민주란을 죽음으로까지 몰고간 장학모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Posted by lawm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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