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욕망의 성(城)

 

1. 거부할 수 없는 제안

 

조간 신문에선 장마전선이 북상하면서 중부지방에도 곧 장마가 시작될 거라는 일기예보가 있었다. 한낮의 태양은 며칠째 머리꼭대기에서 이글거리고, 달궈진 지표면에서 피어오른 복사열이 사방으로 넘실대고 있었다. 가마솥같은 무더위에 신음하고 있던 터에 장마는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우르릉 꽝~’

시커먼 먹구름이 마른 하늘을 뒤덮는가 싶더니 한차례 천둥소리가 창문을 뒤흔들고 곧바로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무실은 이내 음침한 창고 속처럼 어두움에 휩싸였다. 양구홍 계장은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좀도둑질을 하다 잡혀온 소년범 3명을 엄히 훈계하고 있다. 3명의 소년은 고개를 떨구고 있다. 반성하고 있으며 앞으론 비행(非行)의 늪에 빠지지 않을 것을 다짐하고 있다는 듯. 그러나 세 녀석은 양구홍 계장의 시야가 가려진 컴퓨터 모니터 뒤에 나란히 앉아 서로 눈짓을 날리거나 옆에 놈의 허벅지를 쿡쿡 찌르며 장난질에 바쁘다. 그 와중에도 인생이 마냥 즐겁기만 한가보다. 나는 언뜻 그 장면을 훔쳐보고 ‘대책없는 녀석들, 어떻게 혼을 내주지’ 생각한다.


“검사님 손님이 찾아오셨어요” 문가에 앉은 여직원이 타자 치던 손놀림을 잠시 멈추며 째지는 소리를 질렀다.

기록더미에 코를 파뭍고 벌레처럼 활자를 따라가던 나는 화들짝 놀라 얼굴을 들었다. 붉은 립스틱을 칠한 윗입술이 뒤집어져 잇몸이 드러난 얼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마치 공기중에 입술만 동동 떠있는 것처럼 강렬하다. 육감적인 몸매를 감싸고 있는 푸른색 원피스가 실루엣처럼 흔들리고 있는 것이 다음으로 보였다. 두개의 화면이 합쳐지고서야 온전히 사람의 형태를 식별할 수 있었다. 사무실 문앞에 3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서있었다. 3명의 소년범도 흘끔흘끔 그녀를 쳐다본다.

 

“이리 오시죠, 누구시더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민원인이거나 사건 관계인인 것으로 짐작하고 물었다.

“강예리하고 해요, 영주 일 때문에....” 여자가 조용히 다가와 속삭이듯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한다.

“영주라면 민영주를 말씀하시나요?” 나는 ‘영주’라는 말에 화들짝 놀라 정색을 하고 물었다.

“네, 맞아요”

“자 이리로 오시죠” 나는 조급한 마음을 감추며 집무실로 여자를 안내했다.

“어떤 일로 여기까지 찾아오셨나요” 내가 다짜고짜 물었다.

“저는 영주와 함께 휘영각이라는 식당에서 일했습니다. 영주와는 친동생처럼 가깝게 지냈고요.”

“찾아오신 용건은?”

“영주가 이것을 전달해달라고 해서요. 영주는 피치못할 사정이 있어서 제가 부탁을 받고 대신 왔어요.” 강예리는 꼬깃꼬깃 접은 쪽지를 내밀었다.

쪽지를 펼치자 짧게 휘갈겨쓴 한단락의 문장이 눈을 찔렀다.

 

「3일 후 낮 12시, S놀이동산 ‘투탕카멘의 분노’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하늘색 컨버스 운동화에 반바지 차림입니다. 아, 그리고 ‘캐플린’ 모자를 쓰고 있을 겁니다. 꼭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민영주씨가 직접 적어 보낸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피치못할 사정이라는게 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누군가에게 쫒기고 있는 것 같아요,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구요.”

‘쫒기고 있다? 쫒는 자는 홍반장이 말한 장학모의 하수인들인가’ 불쑥 그런 예감이 들었다.

 

3일 후면 이번주 일요일이다. 민영주의 행방을 찾고는 있었으나 그녀가 스스로 내앞에 나타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기회다 싶어 민영주에 대해 시시콜콜 물어보았다. 사실관계는 강예리가 들려준 이야기를 그대로 옮겼고, 혹여 의견이 들어있다면 그것은 순전히 나의 개인적인 느낌이나 견해임을 밝혀둔다. 그 내용은 대강 이러하다.

 


『1년 전쯤이었다. 휘영각 외동딸 사장은 5명의 아가씨를 지목하면서 주말에 시간을 비워두라고 하였다. 거기엔 민영주, 강예리도 끼여 있었다. 외부에서 비밀스러운 파티가 열리면 차출되어 출장을 가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그 때는 장학모가 자신의 별장에서 파티 일정이 갑자기 잡히는 바람에 휘영각 사장에게 부탁했다는 것이다. 원래는 별장에서 상주하는 직원들이 있었으나 당시 무슨 이유인지(아마도 장학모의 눈밖에 나는 짓을 했던 모양이다) 한꺼번에 여러명이 그만두었고, 새로운 직원을 보충하지 못하여 휘영각 아가씨들이 출장을 가게 된 것이었다.

 

토요일 저녁 차출된 5명의 아가씨는 승합차에 실려 2시간 가량 국도를 달렸고, 장학모의 별장에 도착했다. 길이 있을까 싶은 비포장 샛길로 빠져 제멋대로 자란 수풀을 뚫고 조금 들어가자 H강 상류의 장엄한 물줄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서 그런 곳에 어울리지 않게 잘 꾸며진 사설 선착장과 주차장이 나타났다. 주차장과 선착장 사이엔 경비요원들이 사용하는 숙소 건물도 있었다. 그 때도 경비원 두명이 차량번호와 용건을 확인했다. 밤의 장막이 내려앉아 건너편은 잘 보이지 않았다. 어렴풋이 보이는 산등선 아래 검은 공간에서 어렴풋한 조명만이 그곳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 하였다. 선착장에는 매끈하게 빠진 일제 모터보트가 강물에 흔들리고 있었다. 지붕까지 달린 모터보트는 10여명은 족히 태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모터보트를 타고 강을 건너 반대편 선착장에 내리자마자 대리석 계단길이 이어져 있었고, 30여개의 계단을 올라가자 넓은 정원이 나타났다. 산자락을 깍아 만든 것으로 보였다. 푸른 천연잔디가 깔린 정원엔 기품 있는 고목들과 아름드리 거목들이 별장 건물을 애워싸고 있었다. 강 건너편에서 별장 건물이 잘 보이지 않는 이유였다. 조경수들 사이로 영화에서나 본 듯한 으리으리한 2층 건물이 강을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강을 바라보는 쪽 창들은 모두 통유리로 되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넓은 홀이 있었고, 높은 천장엔 값비싼 샹들리에가 은은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왠만한 연회는 즉석에서 준비할 수 있는 조리실겸 주방이 있었다. 이층으로 연결된 계단은 홀 중앙에서 양쪽으로 타원형을 그리며 올라가고 있었다. 홀 구석구석엔 이름난 예술가의 작품으로 보이는 조각상들이 매끈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고, 고풍스런 옛풍경화가 벽면들을 장식하고 있었다. 별천지요 아방궁이 따로 있을까 싶었다. 처음 와보는 이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주방에선 요리사 2명이 형형색색의 산해진미를 준비했다. 강예리 일행은 미리 준비한 유니폼으로 갈아 입고서 홀에 탁자와 의자를 새로 배열하고 식탁보를 까는 등 분주하게 파티장을 꾸몄다. 별장을 관리하는 책임자는 ‘손님들이 오면 친절하게 대하고, 여기서 보고 들은 것은 절대 강건너로 옮겨가선 안된다’고 당부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모터보트의 엔진소리가 가까이 들릴 때마다 손님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장학모는 미리 와서 손님들을 맞았다. 총 20여명의 남녀가 1층에 마련된 탈의실에서 평상복을 벗고 파티복 차림으로 나와 홀안을 메웠다. 거기엔 지난번 휘영각에서 보았던 금감원의 임국장도 끼여 있었다. 여자들은 젊고 아리따운 반면 남자들은 대부분 늙수그레한 것으로 보아, 또 동성들끼리 무리지어 왔던 것을 보면 부부들은 아니었다. 탱탱한 낯가죽이 번들거리는 남자들의 얼굴엔 떠받들림에 익숙한 사람들 특유의 여유와 당당함이 엿보였다. 여자들은 표정이나 차림새만으로도 여염집 규수들이 아님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눈은 반짝였고 몸가짐은 세련되어 지성미가 풍기면서도 잘 가꾼 몸매에선 교태가 자르르 흘렀다. 상충되는 이미지가 조화를 이룬 절묘한 매력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자세히 다가가 뜯어보면 눈속의 흰자위는 텅빈 들판처럼 공허했다. 정교하게 조탁(彫琢)하였으되 장인의 숨결은 없는 돌조각 같았다. 필요에 의해 급조된 지성이요 여성미였다. 남자들은 뒤에 것은 보지 못한다. 아니 알면서도 열광한다. 쾌락에 조종당하는 남자들, 그들은 그녀들의 영원한 꼭두각시일 뿐이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배움의 많고 적음을 떠나 그녀들 앞에서는 맥없이 무너진다. 무너지고 또 무너진다. 하늘 높은 줄 모르던 권좌도, 평화로왔던 가정의 울타리도, 도도한 역사의 물결마저도 하루 아침에 무너진다. 불쌍한 숫컷들의 비애. 또는 원죄.

 

별장에 모인 처자들은 이런 파티에 자주 드나드는 여대생들이라고 했다. 어떤 경로로, 누구에게 이끌려 이 세계에 진입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각자의 사연이 모두 다를 것이다. 공통 분모가 있다면 낮에는 청순가련한 학생으로, 밤에는 요사스러운 여우로 변신한다는 것이다. 운이 좋으면 애욕에 눈먼 누군가의 애첩이 되어 그 누군가가 쌓아놓은 금은보화를 야금야금 빼먹을 수 있을 것이다. 낙원으로 가는 급행열차를 타는 것이다. 그곳에 모인 처자들 모두의 꿈이고 야망이다. 가끔씩은 더 숭악한 상대를 만나 제 꾀에 몰락할 수 있지만 그 정도 위험부담이야 감수해야 하지 않겠는가. 모든 투자에는 손실의 위험이 늘 있기 마련이므로. 또 남들의 손가락질이 걸리긴 하지만 그쯤이야 무슨 대수겠는가. 아무나 누릴 수 없는 풍요를 쟁취한 자에 대한 부러움이고 자신이 처한 궁핍을 정당화하기 위한 시기일 뿐인 것을. 그녀들은 강변한다. 세상 사람들은 요행을 꿈꾸지만 그것은 짝퉁에 속아주기를 바라는 사기꾼의 심보와 다름없다고. 그러나 자기들은 수요자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진짜 명품이 되고자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따라서 그에 따른 대가는 정당한 것이며 결코 부도덕한 것이 아니라고. 

 

강예주 일행은 분주하게 음식과 술을 나르고 손님들의 시중을 들었다. 주인공들은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거나 서로서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홀에서의 교유가 지겨우면 바같 정원 벤취나 선착장에 준비된 요트에 올라 강바람을 쐬기도 했다. 낭랑한 웃음소리와 걸죽한 목소리들이 섞여 별장은 시끌벅쩍 했다. 하늘과 땅과 별들만이 지켜볼 뿐 오늘밤의 비밀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파티는 의외로 조용히 끝났다. 파티가 끝나자 2층의 방방으로 하나 둘씩 숨어들었다. 이미 방호수와 짝이 정해진 듯 여자들도 뒤따라 들어갔다. 그날의 연회는 술과 음식 보다는 각자의 방에서 벌이는 하루밤 끈적한 유희가 주목적인 것 같았다.

 

강예리 일행은 홀과 주방 뒷정리를 마치고 자정이 다 되어서야 숙소로 정해진 1층 문간방에서 잠자리를 준비할 수 있었다. 그 때 장학모가 민영주를 불렀다. 장학모는 2층에서도 가장 전망 좋은 방을 전용 침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장학모는 잠옷으로 갈아 입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지난 번에 휘영각에서 한 번 봤제, 기억나나?‘’ 민영주가 노크를 하고 들어가자 장학모는 게슴츠레한 눈가에 눈알을 희번덕거리며 사투리를 섞어 한마디 던졌다.

“그럼요, 기억하구 말구요.”

“여(여기)는 처음 와보제, 마이(많이) 놀랐나, 돈과 여자와 술이면 안되는 기 없다 아이가, 내 여(여기) 와서 자빠지지 않는 놈은 한놈도 못봤다, 사람 마음은 다 똑같은 기라, 좋은 거 주고 맛난 거 멕이주면 한코 걸리는 건 당연한기제, 세상에 제일 쉬운 기 먼줄 아나, 돈으로 해결하는 기다, 사람 마음 움직이는 건 원칙도 아이고(아니고) 의리도 아인기라, 아! 그런데 이젠 즐겁지가 않아, 마! 젊을 땐 좋은 일을 해도 나쁜 짓을 해도 무얼 하건 신이 났었는데 이젠 만사가 시들하다, 나도 뭐 좋은 인간은 못된다만 ‘오늘은 무얼 받아먹을까’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개같은 새끼들을 보면 화가 목구멍까지 치민다 아이가, 그기 독약인 줄도 모르는 한심한 새끼들이제, 이짓을 언제까지 해야될꼬, 내 한번 칼자루만 쥐면 다 쥑이뿔란다, 이제 얼마 안남았다, 그 때까진 참야야겠제” 장학모는 지그시 눈을 감은채 혼자말인지 옆사람에게 건네는 말인지를 혼자서 뇌까렸다.

민영주는 문가에 우두커니 선 자세로 잠자코 있었다. 장학모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았다. 가진 자의 회한으로 볼 수 있지만 결국 자기 자랑인 것을.

“장승처럼 서있기만 할기가, 이리 온나, 나도 나이가 먹었는갑다, 와이리 피곤하노, 요즘 팔다리가 쑤시는 기 영 안좋다 말이제, 이리 와서 다리나 좀 주무르거라”

민영주는 고용된 하녀였고, 시키는대로 따를 수 밖에 없었다. 휘영각 사장은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해야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민영주는 쭈뼛쭈뼛 침대에 올라가 장학모의 다리를 주물렀다. 그러기를 한참, 이내 입을 다문 장학모는 코를 골며 잠에 빠져들었다. 민영주는 장학모를 깨워 물어볼 수도 없었고, 언제쯤 자리를 떠야 할지 난감했다.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새벽 동이 터오고 있었다. 불쑥 잠에서 깨어난 장학모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민영주는 그 때까지도 정성스레 자신의 다리를 주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오랜만에 악몽도 꾸지 않았고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았다.

“아니, 니 아직까지 있었나, 내가 잠들면 그냥 돌아가도 되는데..., 미련하기는.... 아무튼 수고했다, 가서 좀 쉬라”

천하의 장학모도 타박은 하면서도 겸연쩍고 미안했는지 그러고 말았다.

“저는 그냥 회장님께서 별 말씀이 없으셔서......”

그날의 민영주의 행동이 의도된 것이었는지, 정말 순진한 때문이었는지 그녀의 말을 들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그 후 장학모는 별장에서 파티가 있을 때면 민영주를 불러들였고, 잠자기 전에 다리를 주므르게 했다. 이젠 “30분 만이데이”, “1시간 만이데이”라고 시간을 정해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민영주의 손길은 왠지 모르게 달콤했고, 금방 잠속에 빠져들곤 했다. 어릴 적 어머니가 자신의 몸을 주물러 주던 때의 꿈을 꾸면서. 민영주는 때로 장학모가 잠결에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기도 했다. 얼마 후 장학모는 아예 별장 관리책임자로 민영주를 앉혔다. 훨씬 많은 급여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휘영각 사장도 적극 추천하였으므로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민영주는 휘영각을 나와 장학모의 별장에서 지내게 되었고, 회장의 가장 가까이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별장 관리 뿐만 아니라 장학모의 은밀한 심부름꾼 역할도 도맡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장학모는 민영주에게 “니, 내 아(아이)나 하나 낳아줄래”라고 느닷없이 물었다. 민영주가 진의를 몰라 대답을 하지 못하자 “아이다 마, 농담이다”라고 말을 돌렸다. 그 후 휘영각 외동딸 사장이 민영주를 불렀다.

“아들 하나만 낳아주면 평생 먹고 살고도 남을만한 재산을 떼어주겠다고 하더라, 장학모 아들이 있었는데 아버지와 의절하고 산에 다니다 죽었단다, 잘 생각해 보거라, 네가 낳은 아들이 어쩌면 대 봉황재벌의 후계자가 될 수도 있는 거다” 장학모는 휘영각 사장을 통해 정식으로 자신의 아들을 낳아달라고 제안한 것이었다.

민영주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충격적인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고 망설였다. 휘영각 외동딸 사장은 “너 이런 기회도 흔치 않다, 남들은 못해서 안달인데 무슨 고민이니, 젊디 젊은 여대생들도 줄을 섰어, 장학모는 마음만 먹으면 모든 여자를 다 자기 걸로 만드는 사람이다, 여자에 아쉬울 게 없지, 나한테 정식으로 중매까지 넣어서 아들을 낳아달라고 한 걸 보면 진짜 너를 좋아하는가 보다, 솔직히 너 횡재한거야, 막말로 아들을 낳지 못한다고 해도 그냥이야 버리겠니, 결혼해서 줄줄이 자식새끼 낳고도 이혼하고 또 재혼하고 하는데 그에 비하면 이건 아무 것도 아니다, 쭉쟁이 남자들하고 만나 사랑입네 하고 연애질이나 하다가 결혼해봐야 아무 짝에도 도움 안된다, 굴러들어온 호박을 왜 마다하니”라고 하면서 영주를 설득했다. 영주는 돈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씨를 뿌린다는 말은 풍문으로 들었지만 실제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더우기 자신에게 그런 제안이 들어오다니. 씨받이가 되란 말인가. 장학모의 말마따나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게 없는 것인가. 하지만 영주는 생명까지 돈으로 거래하려는 시류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한편으론 흔들리고 있었다.


‘나를 보아라, 부모한테 버림받고 아직까지도 고통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내 처지에 좋은 남자를 만나기는 글렀고, 거지 같은 놈들한테 걸려서 해주는 것 없이 서방이랍시고 내 위에 군림하려 들 것이 틀림없다, 평생을 밑바닥에서 사느니 나도 좋고 내 후손도 좋은 거 아닌가, 눈 한번 질끔감으면 못할 것도 없지 않을까’


한편 그 얼마전부터 민영주를 쫒아다니는 청년이 있었다. 청년은 늦은 시각 흔들리는 지하철에서 뒤에 서있던 민영주의 발을 밟았고, 영주가 내리자 뒤따라 내리면서 ‘미안해서 그러니 차라도 한잔 대접하고 싶다’고 하였다. 영주는 ‘괜찮다’며 가던 길을 갔는데 그 청년은 영주의 뒤를 밟아 사는 곳을 알아냈다. 그리곤 편지와 선물공세를 펼쳤고, 영주는 청년의 구애를 단념시키기 위해 한 두번 만나주었다. 그러나 청년은 휘영각까지 알아내어 집요하게 민영주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 청년의 이름은 하경삼이었고, 구청의 하급공무원이라고 했다. 민영주의 비망록에서 발견된 편지의 주인공이다. 민영주는 하경삼의 구애가 덧없는 것이란 것을 알았고, 그에 대비되어 장학모의 제안은 거절할 수 없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제가 아는 건 여기까지예요, 그게 6개월 전쯤이고 영주와는 더이상 연락이 되지 않았어요, 들려오는 소식도 없었구요” 강예리는 긴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어떻게 다시 연락이 된 거죠”

“어제 저희 집 근처에 숨어 있다가 퇴근하는 저를 골목길로 잡아끌고는 이 쪽지만 주고 갔어요, J 검찰청에 근무하는 검사님에게 꼭 전달해달라고 하면서요, 다른 이야기는 나눌 틈도 없었어요, 나중에 연락한다고만 하구선 급하게 어디론가 갔어요, 꼭 무엇에 쫒기는 사람처럼요”

 

장대비는 멈추지 않고 있었다. 소년범들은 반성문만 남겨놓고 이미 돌아가고 없었다.

‘3일 후라, S놀이동산은 알겠는데 투탕카멘의 분노는 뭐지‘ 골똘이 생각에 잠겨 있는데, “검사님 먼저 퇴근할께요”라는 여직원의 째지는 소리에 깜짝 놀라 시계를 보니 저녁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Posted by lawm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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