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투탕카멘의 분노

1.

투탕카멘(Tutankhamen), 고대 이집트 제18왕조 제12대 왕, BC 1361년 9세의 나이로 이집트의 파라오에 등극, 18세에 사망할 때까지 9년간 재위, 1922년 영국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에 의해 룩소르 부근 나일강 서안의 '왕들의 계곡'에서 투탕카멘 무덤 발견, 무덤을 찾는데만 6년, 보물을 조사하고 옮기는데 또다시 6년이 걸린 대역사, 수천 년간 도굴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발굴된 유일한 왕릉, 황금 관, 황금마스크 등 호화찬란한 금은보화 유물 발굴, 발굴에 관여했던 13명의 의문의 죽음.....

 

나는 다음날 아침 일찍 출근하여 ‘고대 왕들의 미스터리’라는 책중 ‘투탕카멘’ 편을 넘기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민영주가 쪽지에 적은 ‘투탕카멘의 분노’가 무엇을 암시하는 것인지 영 알 길이 없었다. ‘투탕카멘’은 사고사인지 암살인지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그렇다면 민주란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일까. 무덤의 신비로움에 빗대어 별장의 비밀을 말하려 함일까. 놀이동산에 있는 어떤 표지를 말하는 것일까.

사무실 정리를 하던 김양이 걸레를 들고 책상 옆 탁자로 오면서 “검사님! 뭐하세요, 아침은 드셨어요?”라고 인사한다. 구내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할 시간임에도 김양이 온 줄도 모르고 멍하니 먼산만 바라보고 있는 내가 이상해 보였던 모양이다. 밖엔 새벽부터 다시 시작된 장마비가 굵은 빗방울로 바뀌어 있다. 출근길, 우산은 받쳐들었지만 바닥에서 튀어오르는 빗물에 어쩔 수 없이 종아리 아래깨를 몽땅 적시며 종종걸음을 재촉하며 청사 안으로 들어오는 직원들의 행렬로 분주하다.


 

 

 

“S놀이동산과 투탕카멘의 분노라, 무슨 연관이 있을까?” 김양이 사무실을 청소하는데 방해가 될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도 모르게 뇌까렸다.

“S 놀이동산에 그런 놀이기구가 있어요” 시원하게 비바람이라도 맞으려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김양이 내 말을 듣고 있었는지 대답한다. 김양에게 물었던 건 아니었는데 자기에게 질문한 것으로 착각한 모양이다.

“아! 놀이기구 이름이었나요?” 내가 돌아서며 반문했다.

“네, 맞아요, 놀이기구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다크라이드라는 거예요, 레일이나 보트 같은 이동기구를 타고 가면서 여러가지 체험을 하는 걸 말해요, 투탕카멘의 분노도 그런 놀이기구의 하나예요” 김양은 기다렸다는 듯 꽤나 자세한 설명까지 덧붙였다.

김양은 놀이동산 마니아다. 부 체육대회 때 무엇을 할지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등산, 축구 등 원하는 종목을 선택하는 란에 동그라미를 치지 않고 기타란에 ‘놀이동산’이라고 기재하여 웃음을 산 적이 있을 정도였다. 전국에 안다녀본 놀이동산이 없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군요, 놀이동산엔 한 번도 가보질 않았으니 알 수가 있나” 나는 그제야 막힌 논의 물꼬를 삽으로 확 튿어낸 것처럼 머리속이 상쾌해졌다. ‘민영주는 S 놀이동산의 그 놀이기구 앞에서 만나자는 것이군, 내가 왜 그걸 몰랐지, 역시 사람의 사고는 경험의 범주를 벗어나기 어려워, 다음번 방 회식 땐 근처 야간 놀이동산이라도 가야겠다’고 생각한다.

 

한가지 숙제를 풀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구속기간 만기가 다가온 사기 사건의 공소장을 쓰려고 컴퓨터를 켜려고 할 때였다.

“검사님! 전화요, 누구신지는 말씀 안하시네요” 김양이 다시 특유의 째지는 목소리로 소리지른다. 김양의 목소리는 처음엔 귀에 거슬렸지만 이젠 익숙해져서 검사실의 일부분이 되어 있다. 나름의 매력일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든다. 습관은 아무리 낯선 것도 익숙한 범주로 무섭게 빨아들인다. ‘누구지, 또 익명의 제보자인가’

“네, 전화바꿨습니다”

상대편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잠시 침묵한다. 1초, 2초, 전화기속의 짧은 정적은 잡다한 모든 소리들을 모아 응축한 듯 무겁다. 그 무게에 내 심장소리마저 멈추어 있다.

“나야, 숙희” 짧은 한마디. 응축된 소리들이 공기속에 풀어져 나는 하늘 끝까지 퉁겨져 오른다. 동규로부터 숙희가 전화할거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다른 일로 정신이 없어 잊고 있었다. 그 숙희가 나에게 말하고 있다. 지난 10여년을 담아.

‘찌르르, 헉’ 이번엔 내가 침묵한다. 1초, 2초,

“한국에 들어왔다는 말은 들었어...잘 지냈니?” 내가 겨우 입을 열었다. 지난 10여년을 담아.

“덕분에, 넌?” 다시 짧은 한마디.

내가 숙희를 단념했을 때, 아니 단념해야 한다고 다짐했을 때 휘감았던 아련한 슬픔들. 한줄 실낱으로 연결된 아름다운 세상을 놓아야 할 것만 같았던 두려움. 생의 버거움을 어떻게 견딜지 주저앉고만 싶었던 막막함. 그 후로도 상당 기간 문득문득 찾아오곤 했던 어쩔 수 없이 살고 있다는 공허함. 깊숙히 파묻어 이젠 형체조차 없이 스러진 것으로만 알았던 미세한 감정의 물결들이 되살아나 폭포수처럼 떨어지고 있다. 단지 짧은 두마디 말을 들었을 뿐인데.

“나 다음주 월요일에 떠나” 부활한 내 가슴속의 격류가 전해졌는지 숙희가 내 대답도 듣기전에 연이어 말한다.

“그래?”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소리치고 싶었다.

“일요일 밖에 시간이 없을 것 같아, 좀더 일찍 연락했어야 했는데, 시간 되니?”

일요일이면 민영주를 만나기로 한 날이다.

“그럼 S놀이동산 정문에서 아침 11시에 보자” 숙희를 단념해야 한다는 10여년전의 다짐은 그렇게 여지없이 무너졌다. 어쩌면 이 순간을 애타게 기다려왔는지도 모르겠다.

“정문에서 11시, 알았어” 숙희도 아무런 사족을 달지 않는다. 민영주를 12시에 만나기로 했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그렇게 숙희와 약속하고 말았다.

 

토요일 저녁, K천변의 뚝방 포장마차에서 홍반장과 소주잔을 기울였다. 장마철 뚝방은 한산했다. 홍반장과의 술자리는 처음이다. 매운탕 안주가 나오자 홍반장이 입을 열었다.

“다음주에 울트라파 조직원들과 구장철을 모두 잡아들이고, 별장 압수수색도 해야겠습니다”

“그래야지요, 이제 막바지 전력투구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틀림없이 장학모가 연루되었을텐데,,, 거기까지 손을 대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아래 선에서 총대메고 잘라버리면 도리가 없지 않을는지, 그게 제일 걱정입니다”

“물론 장학모도 철저히 대비는 하고 있겠지만 싸움도 하기 전에 미리부터 주눅들 필요야 없지 않겠습니까, 핵심만 빠져나가게 할 수야 없지요, 사실은 내일 민영주를 만나기로 했습니다, 결정적인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렇지 않더라도 최선을 다하면 장학모도 충분히 엮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절대 무리수를 두어서는 안되구요, 그건 오히려 우리에게 부메랑이 되어 치명타가 될 수 있다는 걸 명심하십시요, 그렇게 해도 장학모를 놓치면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수사에서 실적보다 중요한 건 절차와 과정입니다”

나는 홍반장의 부담을 덜어주려고 원칙론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알겠습니다, 이제 힘이 솟는 것 같습니다, 장학모를 못잡으면 어쩌나 걱정을 많이 했거든요, 사실 저는 이번 수사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들 놈이 경찰대학에 다니고 있는데, 마지막까지 떳떳한 아비로 남고 싶다는 생각에 공명심이 앞섰덧 겉 같습니다, 그래서 지레 겁을 먹었던 것 같구요”

“혹 이번 수사가 잘 되지 않더라도 홍반장님은 충분히 훌륭한 아버지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건 제가 장담합니다”

홍반장은 이북에서 홀홀단신 남하하여 이곳에 정착했고, 순경에서 시작하여 30년 가까지 야전에서 형사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 정도면 닳고 닳아서 세상과 타협할 만도 하건만 아직 순수한 열정을 잃지 않고 있었다.

“검사님, 내일 민영주를 만나러 가실 때 조심하십시요, 놈들이 미행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지금도 그렇고” 홍반장이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 말에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쌍쌍이 앉아 있는 젊은이들 외에 의심할 만한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행여 실수라도 할까봐 업무와 관련된 이야기는 접고 홍반장의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안주 삼아 오랜만에 많은 술을 마셨다. 울트라파는 홍반장이, 나는 장학모 쪽을 맡기로 약속하면서 우리는 헤어졌다. 

 

 

 

일요일 아침 일찍 깨어나자 투명한 빛의 무리들이 방안 가득했다. 장마비가 쓸고간 하늘은 높고 푸르다. 깨끗이 정화된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울 때마다 심장은 요란하게 박동한다. 깊은 산골짜기에 새롭게 태어난 샘물은 산들바람이 되어 사방에 싱그러운 내음을 뿌리고 있다. 이름모를 새들이 기쁨의 노래를 지저귀고, 사람들은 새로운 시간들을 맞아들이고 있다. 자연은 매순간 변화하면서 인간의 고단한 일상에 휴식을 제공한다. 사방에서 너울거리는 신의 축복을 만끽하는 휴일의 아침. 민영주를 만난다는 것도, 숙희를 만난다는 것도, 머나먼 이국의 일처럼 아득하기만하다.

쇼파에 누워 미루적거리다 시계의 초침 소리가 들리고서야 몸뚱아리는 스스로 출발을 재촉한다. 부랴부랴 승용차에 올라 시동을 거는 순간 조심하라는 홍반장의 말이 떠오른다. ‘그래, 채규팔이 구속되었으니 그와 조금이라도 연루된 놈들은 신경을 바짝 세우고 있을 것이다, 이상한 일이지만 마피아나 삼합회 등 외국의 조폭과는 달리 우리나라 조폭들은 공권력을 두려워한다, 돈으로 매수하는 건 몰라도 먼저 물리적인 공격은 하지 않는다, 물론 공권력을 존중해서도 아니고 순진해서도 아닐 것이다, 마피아나 삼합회처럼 막강한 조직과 자금을 갖추지 못해서일 수도 있고, 5.16과 삼청교육대, 범죄와의 전쟁 등 역사적인 경험을 통해 잘못 설쳐대면 조직이 와해될 수도 있다는 현실적인 불안감 때문일 수도 있다, 때문에 검사나 수사관 개인에 대해 테러야 하지 못하겠지만 일거수일투족 감시의 촉수를 뻗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백미러에 눈길을 주자 뒤쪽 편에 주차된 승용차 운전석에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인다. 아파트 주차장을 빠져나오자 뒤쪽에 있던 승용차도 뒤따라 나온다. 시내 골목골목을 이리저리 돌면서 관찰해보니 내 차를 계속 추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머리칼이 쭛볏거린다. 추적하는 승용차는 1대가 아니라 2대다. 2대의 승용차는 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제3의 차량을 중간에 두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가 때로는 옆차로로 갔다가 내 차량 앞으로 들이밀기도 한다. 이 상태로는 약속장소에 갈 수 없다. 나는 터미널 대형마트 지하 주차장에 차량을 세우고 뒷문으로 빠져나와 터미널로 달려가 B시로 향하는 시외버스에 올랐다. 터미널을 빠져나오면서 차창밖을 보니 마트 앞 주차장 출구 부근에서 2대의 차량이 나란히 대기하고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버스를 2번 갈아타고 중앙고속도로를 지나 영동고속도로에 진입하여 총 2시간이나 걸려서야 S놀이동산에 도착했다. 간신히 제시간에 맞출 수 있었다. 



Posted by lawman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