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S놀이동산 매표소 앞은 이용권을 끊으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고, 출입문에서는 입장객들로 북적거렸다. 지루한 장마비 뒤에 숨어 있던 맑은 해가 오랜 만에 고개를 내밀자 칙칙한 집안에 들어있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나오기라도 한 것 같았다. 짧은 치마에 무릎 가까이 오는 군화모양의 하얀 신발을 신은 젊은 여성들로 구성된 취주악대가 대열을 맞추어 트럼팻, 호른, 색소폰 등 관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요란한 악기 소리가 뒤엉켜 주변은 무질서한 시장바닥처럼 북새통을 이루었다. 오전 11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길게 심호흡을 하고 입구 앞 광장을 이쪽 끝에서부터 저쪽 끝까지 여러차례 훓었지만 숙희는 눈에 띄지 않았다. 얼핏 주차장 쪽에서 정문쪽으로 이어진 아스팔트 위로 눈길을 돌렸을 때 인파속에서 유독 한 여자가 눈더듬을 멈추게 하였다. 그 여자는 웨이브진 긴머리에 선글라스를 끼고 황급히 걸어오고 있었다. 걸음걸이만으로도 숙희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마치 머리속에 숙희의 영상이 새겨져 있다가 눈속에 그대로 투영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투영된 영상은 점점 클로즈업되어 내앞에 불쑥 나타났다. 여전히 멋부린 태가 없는 수수한 차림의 숙희는 주저없이 나를 향해 다가왔고, 선글라스를 벗으며 손을 내밀없다. 우리는 말없이 웃으며 손을 잡았다. 손끝에 전해지는 따스함이 어제의 느낌처럼 친숙하다. 반가움과 간절함을 고스란히 전했고, 전해져왔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아무리 오랜 단절의 세월도 그 간극이 메워지는데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우리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표를 끊어 입장했고, 색색깔의 꽃들이 만발한 만남의 광장 벤취 한켠에 나란히 앉았다. 나는 이곳에서 볼 일이 있던 차에 너에게서 전화가 왔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곳을 약속 장소로 정했던 것이며, 먼저 그 일을 처리해야 하니 잠시 기다려줄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숙희는 갑자기 연락해서 오히려 미안하다며 개의치 말고 용무를 마치고 오라고 했다. 정오가 다가오고 있었고, 나는 숙희를 남겨둔채 투탕카멘의 분노 앞으로 향했다.


 

 


‘투탕카멘의 분노’ 입구 앞에도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번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 하늘색 컨버스 운동화에 반바지 차림, ‘캐플린’ 모자의 여자가 내게 다가왔지만 민영주는 아닌 것 같아 머뭇거리고 있는데, 그녀가 내 앞에 멈추어 서더니 말했다. “검사님이신가요, 민영주씨가 전해주라고 해서요, 입장해서 순서대로 배를 타시면 될거예요” 그녀는 ‘투탕카멘의 분노’ 입장표 1장을 건네주었고, 물어볼 틈도 없이 곧바로 사라졌다. 나는 입구로 향하는 대열 뒤꽁무니를 따랐고, 점점 안으로 밀려들어갔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동굴속처럼 갑자기 어두컴컴해졌다. 천정의 옅은 불빛에 사물의 윤곽이 구분될 쯤 인공으로 만든 물길 위에 쪽배가 하나씩 나타나 대기선에 멈추어섰고, 안내인은 그 때마다 사람들을 태워 안전벨트를 점검한 다음 출발시켰다. 4명 정도 타는 배였는데 내가 올라탄 후 어디서 나타났는지 누군가가 내 뒤쪽에 급하게 몸을 실었다. 나처럼 일행 없이 혼자 입장한 사람인가보다 생각했으나 눈이 어두움에 익숙해지고, 문득 뒤를 돌아보자 민영주임을 직감으로 알았다. 쪽배는 물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다가 피라미드 입구를 지나 투탕카멘의 무덤안을 그대로 본 떠 만든 보물의 방, 황금마스크가 누워 있는 방 등을 차례로 거쳐갔다. 중간중간에 어두움 속에서 괴물들이 무서운 눈을 부릅뜬채 입을 벌리고 있거나 붕대로 감겨진 미이라가 벌뻑 일어나거나 무덤을 발굴하다 죽은 사람들의 해골이 느닷없이 공중에서 떨어지거나 기괴한 소리들을 내보내 공포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하지만 뒤쪽에 앉은 민영주를 향해 신경이 곤두서 아무런 스릴도 느낄 수 없었다. “민영주라고 해요, 이런 식으로 만자자고 해서 죄송합니다, 그냥 듣기만 하십시요, 저는 지금 쫒기고 있습니다, 워낙 용의주도한 놈들이라 언제 잡힐는지 모르겠습니다, 자 이걸 받으십시요” 민영주는 서류봉투를 건네주었다. “언니가 죽음에 이를 수 밖에 없었던 과정과 장학모의 모든 비밀이 낱낱이 적혀 있습니다, 수사의 중요한 단서가 될지 모를 것 같아서 어떻게든 전해드리려고 하다보니 이렇게 됐습니다, 서둘러 주십시요, 자세한 말씀은 훗날 제가 살아있다면 하도록 하지요, 제가 먼저 내릴테니 나중에 따로 내리십시요” 내가 말을 건넬 사이도 없이 그녀는 비상구 전광판이 보이는 곳에서 뛰어내렸다. 나는 쪽배의 피라미드 여행이 끝날 때가지 남아 있다가 밖으로 나왔고, 나오자마자 급한대로 화장실로 들어가 서류봉투를 열어 보았다. 겉표지가 빨간 스프링 노트 한권과, 검정색 장정의 장부 한 권이 있었다. 거기서 내용을 일별하기엔 여의치 않아 들고온 가방 안에 집어넣었고, 숙희에게로 갔다. 서둘러 달라는 민영주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하지만 숙희와의 만남도 망칠 수가 없어서 궁금함과 조급함을 잠시 보류하기로 했다. 어차피 주말이고, 당장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으므로.




숙희와는 식사를 하고 자판기 커피를 마시면서 2시간 가량을 더 보낼 수 있었다. 숙희는 파리 3대학에서 발자크의 환상문학을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고, 모교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고 했다. 6개월간 교환교수로 한국의 모 대학에 와 있다가 이제 출국하게 되었다고 한다.

“현지인과의 열렬한 사랑 운운은 사실이 아니었어, 외롭고 힘들 때마다 포기하고 싶었는데 그건 너 때문이었어, 너는 언제부터인가 나의 안식처가 되어 내 의지를 가로막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야, 변명일지 모르겠지만 나의 나약함은 너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 거란 생각도 들었지, 나는 기왕의 목표에 다가가고 싶었고.... 그래서 너를 더이상 볼 수 없을 것 같다고 한 거야, 그런데 이제와 돌이켜보면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던 것 같아, 그러고 나면 결연하게 학문적 성취에만 몰두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않았어, 헤어짐은 헤어짐만으로 끝나는게 아니었던 거야, 구체적인 언어로 단호하게 선언한들 마음 속의 감정은 지울 수 없는 거였지, 결국 그건 너를 속인 죄책감까지 가중된 고통의 시작이었어... 지금껏, 너를 다시 볼 염치가 없는 줄 알지만 미안하다는 말은 꼭 하고 싶었어” 숙희는 담담하게 말했고, 나는 “그랬구나”라는 한마디 외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나는 민주란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고, 숙희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숙희를 서울행 버스에 태워보내기 전 용기를 내 포옹을 했고, “미안해 하지마, 내가 너에게 짐이었다면 이제 모두 내려놔, 바보처럼 너의 진심을 몰랐던 내 잘못도 커, 이렇게 다시 만났으면 된 거 아니니, 앞으론...”이라고 끝맺음 없는 귓속말을 했으며,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끝맺음은 ‘앞으로 우리 다시는 이러지 말자’였거나, ‘앞으로는 너를 놓치지 않을거야’였을 것이다. 나는 숙희를 보내고 곧바로 J시로 돌아왔다.


빨간색 스프링 노트엔 민영주가 민주란을 만난 때로부터 현재까지의 내용들이 들어 있었다. 지난번 민영주의 비망록에서 빠진 부분이었다. 장학모의 장부는 공개할 수 없는 비밀스런 거래를 따로 모아둔 것으로 보였다. 민영주의 새로운 비망록을 짧게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6개월 전쯤 민영주는 장학모의 별장 관리인으로서 서울과 별장을 오가며 지내고 있었다. 민영주는 아들을 낳아달라는 장학모의 제안을 받았고, 주변의 부추김에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장학모는 휘영각 사장에게 부탁하였으나 민영주의 결심이 늦어지자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 장학모는 민영주에게 지하 금고를 보여주었다. 지하에는 벽마다 책장이 들어차 있었고, 책장엔 책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단지 장식용일지언정 탐욕의 화신처럼 보이는 장학모가 책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다니 믿기지 않았다. 음모와 계략도 타고난 것이 아니라 어디에선가 배워야 하는 것일까. 책장과 책장 사이의 공간 낮은 탁자 위에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은 화병 하나가 놓여져 있었고, 화병 주둥이는 가운데가 반원형으로 파여져 있었다. 여느 화병과 다를 것이 전혀 없었다. 거기에 옥구슬을 올려놓자 아귀가 정확히 들어맞았고, 육중한 대리석 바닥이 열리더니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아무도 그곳에 그런 비밀 금고가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옥구슬은 장학모의 방 작은 금고에 따로 보관하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 불을 켜자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통로를 빼고는 현금다발과 금괴, 골동품, 미술작품 등 진귀한 것들로 가득 차있었다. 마치 투탕카멘의 무덤처럼. 죽으면 이곳에서 미이라가 되어 누어 있으려고 하는 것일까. 막대한 재물을 어떻게 입수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합법적인 것이 아님은 분명했다. 장학모는 “잘 봐 둬라, 이기 다 니끼 될 수도 있다, 알겠나“라고 하였다. 그리곤 두툼한 장부를 들어 손바닥에 탁탁 치면서 ”이건 세상을 다 뒤집어 놓을 수 있는 요지경인기라“라고 하였다. 이곳을 설계한 사람과 심복인 구장철 외엔 아무도 여기를 모른다고 했다. 장학모는 민영주에게 서울에 오피스텔을 매입해주었고, 용돈으로 수천만원씩을 거리낌없이 찔러주었다. 장학모도 민영주에게서 만큼은 마음을 얻고 싶었는데 여의치 않자 조급한 나머지 예의 물량공세로 나온 것이었다. 재물로 안되는 것이 없고, 얻어 먹은 놈은 달라질 수 밖에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민영주도 그랬다. 서서히 단단한 마음의 벽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장학모가 놓은 덫에 걸려들면 피할 방법은 없어 보였다. 언제나 별장에서 잠들기전 다리를 주무르게 하면서도 완력을 사용하지 않은 것을 보면 어쩌면 간교한 덫이 아니라 정말로 자신의 전부를 주고 싶은 장학모의 순애보일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던 어느날 밤이었다. 그날도 환락의 파티가 있었고, 민영주는 장학모의 취침 자리를 마련해준 다음 문간방 자신의 숙소로 돌아와 장학모의 유혹을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느라 밤잠을 설쳤다. 밤의 강풍경이라도 보면 마음이 안정될까 싶어 밖으로 나와 정원을 서성이고 있었다. 하늘엔 그믐달이 갈고리처럼 걸려 있었고, 사위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들짐승들의 울음 소리만이 처연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그 때 숲속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멧돼지라도 나타났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무서움에 얼른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고 돌아서려는데 저만치에서 사람의 형체가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도둑일리는 없을 것이고, 그 시간에 누가 나와 있기라도 한 것일까. 사람임을 알고서는 조금 안도하면서 멍하니 그 형체가 모습을 드러내기를 기다렸다. 움직임이 보이지 않기에 민영주가 “누구세요”라고 소리쳐 보았고, 상대방은 흠칫 놀라며 나무 그늘에서 모습을 드러내고는 뒷걸음쳤다. 상대방은 여자였고, 흐릿한 달빛에 드러난 얼굴을 보자 일순간이었음에도 자신의 분신인 것처럼 착각에 빠졌다. “잠시만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테니 도망가지 마세요” 민영주는 다급하게 상대방을 불러세웠다. 상대방은 그 말에 뒤로 돌아섰고, 마주친 두 사람은 한참을 망연히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무슨 일로 이 시간에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지만 잠시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밖은 더 위험해요, 저도 이곳에서 일하는 하녀일 뿐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요”라고 민영주는 겨우 입을 떼었다. 상대방도 주저하다가 어쩔 수 없게 되었다는 듯 민영주를 따라 들어왔다. 민영주는 자신의 문간방으로 그녀를 데려왔고, 서로의 이름을 듣는 순간 두 사람은 헤어졌던 쌍둥이 자매였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보다 더 운명적인 만남이 있을까. 민영주는 비망록에서 그렇게만 적었을 뿐 다른 언급은 없었다. 두 사람이 오랫동안 헤어졌던 핏줄이었음을 확인하는 순간의 장면은 나도 상상하기 어렵기에 섣불리 펜을 놀릴 수 없다. 아무튼 두 사람은 새벽까지 밖에서 누가 들을까봐 소곤거리며 끝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민주란은 별장 뒤 산자락 끝에 솟아 있는 바위벽을 타고 내려왔다고 했다. 바위에 하켄을 박고 암벽등반용 로프를 걸어 하강한 다음 길도 없는 숲길을 헤치고 온 것이다. 민주란은 자신의 아들을 찾기 위해 장학모를 만나려고 회사로도 찾아가고 집앞에서도 기다렸으나 경호원들의 장벽에 막혀 번번히 실패하였다. 민주란이 아들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아들 또한 집밖으로 내보내는 일이 없었다. . 전화를 걸어도 연결되지 않았고, 편지를 써보내도 답장이 없었다. 민주란이 지쳐 돌아갈 때까지 철저하게 장막을 쳐둔 것이리라. 그렇게 무모한 기다림만으로 6개월이 흘렀다. 얼마전 택시를 대절하여 장학모가 탄 차량을 추격하였는데 이곳 별장에 자주 온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별장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한 끝에 배를 타고서는 삼엄한 감시망을 피할 수 없고, 별장 뒤 숲을 통하면 안전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길도 없는 산을 오르고, 암벽장비까지 동원하여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별장에서 숨어 기다리다 장학모를 만나게 되면 담판을 지을 생각이었다. 조부로서의 권리는 인정할테니 아이를 자신이 키울 수 있게만 해달라고 애원이라도 하려던 참이었던 것이다. 민영주는 그런 방법으론 장학모를 설득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고, 아이를 장학모의 지배로부터 영원히 떼어내도록 도와주겠노라고 했다. 강건너 농가에서 새벽닭이 울었고, 그 길로 두 사람은 함께 숲속을 지나 민주란이 미리 걸어둔 로프를 타고 바위를 넘어 S읍으로 왔다. 민주란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듣자 민영주도 미련없이 그곳을 뜰 수 있었던 것이다. 장학모가 보여준 금은보화도 일순간에 하찮은 쓰레기쯤으로 여겨졌고,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 싶었다. 장학모 가까이에서 묘안을 찾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멀리 가지는 못하고 S읍에서 오피스텔을 얻어 함께 지내게 되었다. 워낙 좁은 바닥이라 외지에서 온 여자 두 명이 아무 하는 일 없이 나다니면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볼 것이 뻔하였으므로 민영주는 광고를 보고 여왕벌 마담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민영주는 언니와 조카랑 함께 살 수만 있다면 천금만금도 부럽지 않았고,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민주란 또한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쁘면서도 아들을 어떻게 데려올 수 있을지 근심이 깊어갔다. 뽀족한 수를 내지 못하면서도 꿈결처럼 다시 6개월의 시간이 지나갔다. 민영주는 장학모의 금고에서 보았던 비밀장부를 꺼내와 협상하면 장학모도 어쩌지 못할 거란 생각에 이르렀다. ‘세상을 다 뒤집을 요지경인기라’ 장학모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민영주는 자신이 다시 별장으로 들어가 장부를 꺼내오리라 결심하고 민주란에게 말했다. 민주란은 들어가는 것은 가능하다 하더라도 나오는 건 어떻게 할거냐고 물었다. 민영주도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했던 터라 무어라 답을 하지 못하자 민주란은 암벽등반을 할 수 있으니 이전처럼 자신이 별장으로 들어가 장부를 꺼내 숲을 통해 나오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러니 장부가 있는 곳만 알려달라고 했다. 민영주도 듣고 보니 그것이 더 성공가능성이 높을 것 같았다. 민영주는 별장에 찾아갔다가 빠져나올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민영주는 노트를 꺼내 옥구슬이 숨겨진 장소와 지하 금고로 들어가는 곳, 금고를 여는 방법에 대해 그림을 그려가며 세세히 일러주었다. 장학모가 방안의 작은 금고를 열 때 우연히 그 비밀번호도 외워두고 있었기어 그 또한 알려주었다. 장학모가 별장에 없을 만한 날을 디데이로 택했다. 민주란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민영주의 차림새를 한 다음 별장으로 향했다. 차량으로 별장 뒷산에 가장 근접한 곳까지 이동한 다음 이전에 바위에 박아둔 하켄에 로프를 걸어놓고, 로프끝에는 위급한 상황에 대비하여 등강기, 프랜드, 퀵도르 등 장비를 챙겨넣은 배낭을 매달아 두었다. 그리고는 선착장으로 돌아와 장학모를 만나러 온 민영주 행세를 하며 별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 별장안엔 아무도 없었고, 민영주가 알려준대로 장학모의 방에 들어가 작은 금고 비밀번호를 눌러 금고속에서 옥구슬을 꺼냈다. 후래쉬를 들고 지하 서재로 들어가 화병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장학모의 방 침대맡에 화병이 있었다는 것이 떠올랐고, 다시 장학모의 방에서 화병을 가져와 그 위에 옥구슬을 올려놓은 다음 금고로 들어가는 문이 있을 법안 곳을 왔다갔다 했지만 바닥은 좀체 열리지 않았다. 어딘가 문이 열리는 정확한 위치가 있는 듯했다. 민영주가 화병이 있는 위치를 그려보였던 그림을 기억속에서 끄집어내자 낮은 받침대가 보였다. 그 위 홈이 파인 곳에 옥구슬이 올려진 화병을 올려놓자 대리석 바닥문이 열리며 지하 금고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계단을 타고 내려가 이곳저곳을 뒤져 간신히 장부를 발견하였다. 화병을 장학모의 방 침대맡에 가져다두고 미리 준비한 비숫한 모양의 옥구슬을 금고 속에 바꾸어 놓고는 진짜 옥구슬도 들고 나왔다. 뒷산을 통해 암벽을 타고 산을 넘어 다시 차량을 타고 도로로 나왔다. 민영주는 미리 정해둔 민박집에서 기다리리고 했고, 민주란이 그곳으로 오기로 했었다. 민주란은 차량 운행도중 민영주에게 전화하여 민박집 앞에 나와 있으라고 하였고, 민박집 앞에 이르러서는 민영주를 태우고 황급하게 운전해 갔다. 민주란은 다리 부근에 이르러 갑자기 차량을 세웠다. 민주란은 민영주에게 무슨 영문인지 다급하게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하자’고 하면서 가방속에서 장부를 꺼내 건네준 다음 자신은 차량에서 내리고 민영주에게 얼른 운전하여 떠나라고 재촉했다. 민영주는 시키는대로 현장을 떠나 묶고 있던 민박집으로는 돌아가지 않고, 그 길로 서울로 향했다. 민주란의 황망스러운 태도가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민주란은 어는 순간 신발에 추적장치가 있다는 것을 알았챘던 것 같고, 추격이 멀지 않았음을 직감했을 것이다. 그리고 민영주을 떠나보내고 자신이 뒤에 남아 추격자들을 따돌리려고 했으나 비극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이것이 대략의 전말이다. 


이제야 차도연, 강예리, 채규팔의 각각의 진술 내용을 모두 하나로 연결지을 수 있었다. 그랳다. 민주란은 마지막 순간에 쌍둥이 동생인 민영주를 위해 온몸을 던져 희생한 것이다. 서로에 대해 아무런 기억도 없이 살아가던 두사람은 운명처럼 만났고, 남은 인생만큼은 오래도록 함께 하리라 눈물로써 다짐했지만 그 행복은 너무나 짧았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고 하지만 민주란에게 주어진 운명의 시계추는 왜 그렇게나 빨리 멈추어야만 했단 말인가. 욕망의 성에선 여전히 부끄러움 모르는 아귀들이 들끓고 있으련만..... 나는 슬픔과 분노의 불덩이를 삼키고 또 삼켰다.    

Posted by lawm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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