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대밭골 연가(戀歌)


부족한 글솜씨를 총동원하여 가까스로 내 첫기억(정확하게는 그녀에 대한 내 첫기억)을 되살려냈다. 이제 잠시 우리의 시간여행은 그 때로부터 앞으로 가기를 멈추고 그 너머에 무엇이 있었는지 조금만 거꾸로 걸어가보자. 누구에게나 있었고, 누구나 지나야 했을 유년의 뜨락을 향해. 현재는 늘 과거라는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으므로, 과거로 난 창을 통해 이전 삶의 한 단면을 들여다보는 것은 현재와 미래를 이해하는데 그리 무용한 일만은 아닐 것이리라. 또 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상당수가 내 첫기억 이전에 이미 나와 인연을 맺었기에 거꾸로 걷기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이 글의 논의에서 벗어난 것일 수도 있어 뜬금없고 별 재미는 없겠지만 부디 양해있으시기를.


1. 종손

나는 당시만해도 서울에서 가려면 경부선 완행 열차를 타고 H역에서 내려 S읍내까지 직행버스를 타고 또 거기서 시외버스로 비포장도로를 달려 꼬박 10시간 이상은 걸려야 도착하던 면소재지 산골에서 나고 자라 그곳 중학교까지 졸업했다. 내가 살던 마을 이름은 대나무밭이 많다 하여 대밭골이라고 했다. 일제 때 마을 이름을 한자식으로 바꾸면서 죽전동이 되었다가 해방후 행정구역을 정비하면서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공식 명칭이 상현리로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직도 대밭골 또는 웃마(윗마을의 사투리)라고 지칭하는데 익숙해있다.

우리 집안은 나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16대 선조대부터 그곳에 정착해 살았다고 한다. 선조들은 충청도 어느 마을(아마도 ‘대머리’일 것이다. 머리 벗겨진 대머리가 아니다)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는데 고려말에 왕조교체에 반대하다가 한마을이 전부 천민 부락으로 강등되면서 그곳을 빠져나왔다고도 하고, 조선조 세조 때 단종복위 운동을 돕다가 멸족되다시피하여 그중 살아남은 가손들이 도망와 정착했다고도 한다.

대밭골 시조 할아버지가 마을 중앙에 심었다는 노송의 나이가 600년 가까이 되었음을 들어 이 마을에 정착한 가문의 기원을 고려말 또는 조선초로 삼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왕조교체니 단종복위 운동과 구체적으로 어떻게 관련되었다는 것인지는 아무도 그 증거를 대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세대를 거쳐 오랜 세월 구전으로 내려왔다는 권위에 가탁(假託)하여 어느 누구도 그에 대해 이의를 달지는 않았다.

세상에 이름을 떨친 조상도 없고, 그렇다고 내세울만한 가풍이나 가세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빈약한 문중의 정체성을 미화하기 위해 누군가 만들어낸 신화라는 의심이 들기는 하지만 나 또한 가문의 역사에 흠집을 내고픈 생각은 추호도 없으므로, 또 국가나 가문이나 그 탄생에 관한 신화 하나쯤 있는 것도 그리 나쁠 것이 없으므로 그에 대한 의구심은 이쯤해서 그만 접기로 하자.

어쨓든 나는 그 소종중의 16대 장손이었다. 아버지는 조상대대로 이어받은 손바닥만한 밭뙈기와 기껏 나락 10섬 남짓 소출되는 다락논 몇마지기를 목숨보다 아끼며 평생 고향을 떠나본 적이 없는 분이었다.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도 모두 그러했으리라.

내가 철들 무렵부터 아버지는 직접 나를 향한 것인지 또는 어머니가 들으라고 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모름지기 집안 장손은 선조들이 누워계신 이곳을 꼭 지켜야 한데이, 그기 장손으로 태어난 의문기라, 대대손손 번성하려면 그리해야 되는기라, 밝은 세상이 되어 너나 없이 높은 핵교까지 다니는 것이 옛날 벼슬얻은 것 마냥 굴지만 한글만 깨우치면 사는데 아무 문제 없다, 야야 봐라, 공무 마이 시켜놓으면 뭐하노, 머리에 든 게 있으이 다 지 살라고 고향 떠나고, 본인들 길러준 고향생각은 눈꼼만큼도 없는기라, 교장어른 아들도 그렇고, 해미댁 아들네미도 그렇고, 장손은 그라믄 안되는기라"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교장어른 아들은 전국에서 10등 안쪽에 드는 성적으로 S대학에 입학했고, 마을의 자랑거리였지만 대학 3학년때인가 유신반대 시위를 주도하여 감옥소를 들락거리다 이제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연락조차 안된다고 했다.

과부 해미댁 아들네미는 그 어미인 해미댁이 마을 장터에서 국밥집을 운영하면서 동네 한량들과 떠돌이 장똘뱅이들의 온갖 추파를 참고 이겨내며 억척스럽게 돈을 벌어 서울에 있는 대학까지 졸업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그놈이 대기업에 취직하고 부잣집 외동딸과 결혼하고서는 그 집 데릴사위 역할이나 하면서 해미댁을 홀대하고, 자신의 출신조차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가지 사례를 들었던 아버지의 진짜 의중, 그러니까 현대적 배움이 사람을 불온하게 만든다거나 배은망덕하게 만든다거나 한다는 것에 공감하는 바는 아니지만 다른 의미에서 돌이켜 보면 아버지의 그 말씀이 맞는지도 몰랐다. 활자로 익힌 지식나부랭이들을 망태기에 담아 짊어지고 그것을 부릴 곳이 마땅치 않아 회색빛 도회의 언저리를 배회하는 나그네로 전락한 지금의 내 삶과 비교해보면 아버지의 그 말씀이 옳았음은 두고두고 뼈져리다.

아마도 문명 세계에서 숨쉬고 있는 우리들은 천형을 받아 뾰족한 산위에 바위를 올려놓아야만 하는 시지프스처럼 매일매일 새로운 짐을 쌓아놓기만 하고 버리지도, 놓지도 못한채 서서히 지쳐 가고 있는 것이 아닐는지. 부, 명예, 권력, 탐욕이라는 짐 말이다. 아버지가 앎으로 인한 폐혜로 지적한 것이 그런 끝모를 욕심이었다면 아버지의 말씀은 지금도 지극히 유효하다.

다시 대밭골로 돌아가 보자. 어린 나에게 종손으로서 유일한 특권이라면 삼촌들을 제치고 증조할아버지와(증조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할아버지와) 겸상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당하는 입장에서는 마주한 어른이 수저를 들기 전에는 꼼짝없이 기다려야 하고, 군침 도는 먹을 거리가 있어도 어른이 먼저 젓가락을 댈때까지 참아야 하는 고역을 동반한 특권이었다. 덕분에 형식과 규율은 자유를 억압하고, 외형상의 권위는 결코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어쩌면 많은 것을 잃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일치감치 깨닫게 해주었지만 말이다. 아마도 어른들은 그런 특권 아닌 특권을 부여하면서 부지불식중에 내게 주어진 운명이 무엇인지 뿌리깊이 각인시키려고 했었을 것이다. 다른 한편 할아버지는 내게 특권을 부여한 대신 내가 일곱살 때 내 체구에 맞는 지게를 직접 만들어줌으로써 의무 또한 지니도록 하셨다. 그 때부터 나는 여름이면 쇠풀을 베고 겨울이면 나무 한짐씩을 해왔다. 그것은 다름 아닌 농부의 가족 구성원으로 살아가야 하는 최소한의 의무를 알려준 것이기도 하고, 가솔들을 책임져야 하는 장손 또는 남자의 임무를 알려준 것이기도 하다. 마을 어른들은 예로부터 이어져온대로 그렇게 고향, 종중, 남성 중심의 우리 안에 남자 아이들을 가두고 멀리 도망가는 것을 막으려 하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달랐다. 나는 언뜻언뜻 어머니의 얼굴에서 타고난 영민함과 지혜로움 뒤에 감추어진 우울함을 볼 수 있었다. 혹은 우울함 뒤에 감추어진 영민함과 지혜로움일 수도 있다. 그것은 가난으로 인해, 여자임으로 인해 큰 세상에 나가보지 못하고 산골 작은 마을에서 생을 마감할 수 밖에 없는 그 시대 여자의 일생에 대한 저항이다. 내가 조금씩 배움에 대한 의지와 싹을 보였을 때 그 저항은 나에 대한 채찍으로 변해있었다. 어머니는 어느날 부엌에서 쪼그리고 앉아 군불을 때고 있다가 옆에서 불쏘시개로 장난을 치고 있던 나에게 “대접아, 그깟 장손 나부랭이가 무슨 대수고, 마이(많이) 읽고, 넓은 세상에 나가 마이 보거래이, 그기 사나(사나이의 사투리)가 할 일이다, 사나는 힘을 가져야 되는기라,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힘 말이다, 니 아비, 니 할배같이 집안 아낙이나 얼라(어린 아이)한테나 큰 소리치는기 무슨 사나고, 니가 커서 힘을 가지면 우리같이 억울해 우는 사람이 없도록 해보거래이, 그기 니 할일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아궁이 속의 불길만을 응시한채. 당시 어머니가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하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말뜻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지만 어린 나에게도 그 말속에 들어있는 전율은 속속들이 전해졌고, 그래서 한마디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 후로 나는 어머니에게서 그 비슷한 말을 한번도 다시 들어본 적이 없다. 참고로 내 이름은 대접이 아니다. 어머니는 대접 같이 큰 사람이 되라고 나를 호칭할 때 대접이라고 불렀다. 집에서 부르는 이름 또는 아명이라고나 할까.

어머니의 무언의 지지 아래 나 또한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에 농사일에 투입되는 시간 외에는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아버지의 눈을 피해 호시탐탐 읽을거리를 찾았다. 내가 처음 책의 마력을 알았던 건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할아버지가 발명한 개량 탈곡기에 왼쪽 검지손가락 한마디가 잘려 외삼촌의 손에 이끌려 병원에 갔었던 적이 있다. 돌아오는 낙동강 배위에서 외삼촌은 내 무릎 위에 책을 한권 놓아주었었는데 겉표지에 ‘보물섬’이라고 적혀있었다. 그 때 하늘엔 검붉은 노을이 지고 있었고, 무심코 책을 집느라 들고 있던 풍선을 놓쳐버려 풍선은 하늘로 빠르게 올라갔다. 나는 노을 속으로 빨려들어간 풍선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쳐다보았고, 눈에서는 눈물 한방울이 흘러내렸다. 

집에 돌아온 후로 나는 잘려진 손가락에서 전해오는 통증도 잊은채 책표지가 닳아 찢겨져나갈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부모님을 도와 여인숙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소년 짐 호킨스, 여인숙에 묵었던 술주정뱅이 뱃사람 빌리 존스, 그의 죽음 이후 궤짝에 남겨진 보물섬 지도, 지도의 가치를 알아본 의사 리브시와 지주 트렐로니는 배와 선원들을 구해 짐 호킨스를 데리고 보물을 찾아 위험천만한 항해를 떠나고, 요리사로 고용된 외다리 존 실버는 호탕한 성격과 의리와 신의를 갖춘 뱃사람으로서 신임을 얻지만 사실은 내면에 천박함과 탐욕으로 가득차 있는, 보물을 독차지하기 위해 반란을 주도하는 해적의 우두머리였고, 그 후 보물섬에서 호킨스 일행과 해적 무리들의 쫓고 쫓기는 피비린내 나는 전투, 그 과정에서 짐 호킨스는 모험심과 호기심, 재치를 발휘해 위기때마다 일행들을 구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히 싸워 이겨 낸 짐 호킨스 일행은 마침내 해적들을 따돌리고 보물을 차지하고, 해적 일당을 이끌던 존 실버는 살 길을 모색하다가 결국 보물 일부를 훔쳐서 어디론가 사라지고.... 등등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개성넘치는 등장인물들은 한 시골 소년의 마음을 훔치기에 너무나도 충분했다. 그러나 ‘보물섬’ 이후 체계적으로 읽기를 가르쳐줄 사람도 없었고, 마을엔 읽을 거리가 변변치 않았다. 혹시나 외삼촌이 나에게 줄 책을 들고 방문하지나 않을까 기대하며 가끔씩 사립문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가 집집마다 불쏘시개나 화장지로 사용하는 낡은 책들이 굴러다닌다는 것을 알고, 이집저집을 돌아다니며 뜯겨져나가 일부분만 남아있는 책들을 몰래 집어와 읽었고, 심지어 뒷간에 볼일을 보고 사용하라고 잘게 잘라 걸어놓은 책 조가리들도 내 눈을 피해갈 수 없었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자기가 전심력을 다하여 사랑하여 오던 자가 또는 자기를 전심력을 다하여 사랑하거니 하던 자가 일조에 자기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줄을 깨달을 때에 그 슬픔이 얼마나 할까"라는 식의 세로로 쓰인 신파조의 글들, 앞선 세대의 마을 청년들이나 처자들의 심금을 울렸을, 그러다 버려진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나는 뒷간 틈으로 바라보이는 대밭골의 수호신인 우뚝한 봉황산 저편의 또 다른 세계를 꿈꾸었다.

그것은 금기시하면 할수록, 부족하면 부족할 수록 더욱 하고 싶은 마약과도 같았고, 나머지 세상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무한한 보고였고, 현실속의 초라함을 담대한 도전으로 승화시키는 신묘한 처방전이었다. 요즘 아이들이 인터넷이나 게임에 몰입하는 것도 방법이나 소재만 달라졌을 뿐 같은 맥락이라 생각하면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것도 같다. 자라면서 가끔씩 마을 장터에 들어선 순회 천막극장에 몰래 들어가 철지난 영화를 훔쳐보기도 하였고, 친구들과 모의하여 그 나이에 갈 수 있는 곳이면 첩첩산중이던, 마을 앞 개천과 이어진 강가의 다른 마을이던 어디든 뒤져 온갖 장난질을 해보아도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은 보물섬에 대한 갈증은 채워지지 않았다. 그러다 초등학교 5학년쯤 되었을 때 마침내 체계적으로 독서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도시의 학교에서 산간벽지 아이들에게 도서보내기 운동으로 학생들이 한권 두권 모아 보낸 책들이 우리 학교 작은도서관을 장식하게 되었고, 나는 그네들에게 감사해하며 처음 읽었던 아이들이 끄적거려놓은 행간의 낙서까지도 놓치지 않는 충실한 독자가 되었다. 점점 충성심 강한 독자가 되어갈 수록 대밭골은 점점 작아졌고, 마음속 세상은 점점 커져만 갔다. 언젠가 꼭 그곳에 가보리가 다짐하면서. 





http://modulaw.com   

Posted by lawman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