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선택

 K 고등학교 진학 후 2학년 말쯤 되었을 때이다. 나에게도 어쩔 수 없이 장래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답을 제시해야만 하는 시기가 찾아온 것은. 그 답은 하고 싶은 일일 수도 있고, 종사해야할 직업일 수도 있고, 평생을 천착해야할 무언가일 수도 있다. 어떤 답을 내놓는가에 따라 갖추어야 할 조건이 주어질 것이고, 해야 할 일의 순위가 결정될 것이며, 삶의 모습과 색깔이 규정될 것이다.

선택은 누가 강요하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선택하지 않을 자유 또한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처음 알을 깨고 나와 둥지를 떠나야 하는 새처럼 더 이상은 아무도, 그 어느 곳도 나를 품속에 두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조금씩 엄습해오고,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보다 나아야 하고 다른 사람과 달라야 한다는 경쟁심이 자라날 수록 선택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되어 갔던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선택은 강요된 것이었다. 스스로를 올가미에 옥죄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채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인 것처럼 착각하면서.

어린 아이는 도화지에 아무렇게나 끄적여 놓아도 용서가 되지만 이젠 알아 볼 수 있는 기호와 형상을 그리지 않으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을 것이 분명하였다. 적어도 간교하고 좁아진 내 정신세계에서는 달리 판단할 여지가 없었다. 안타깝게도 버림받을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자유정신은 어느 단계에선가 사라져 버렸고, 나는 세상살이의 속된 관념에 이미 많이도 물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여러 갈래 길도 결국은 한 점에서 다시 만난다는 것을 그 때는 알지 못했다.

선택을 할라치면 자꾸만 당시 또래 사이에 유행하던 시구가 떠올라 나로 하여금 주저하도록 방해하였다.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도 한남자와 한여자가 바람부는 나무 아래에서 마주보며 지긋이 손을 잡고 있는 흐릿한 그림 위에 인쇄되어 8절지 공책 맨앞장을 단골처럼 장식하던 그 시구.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이라는 프로스트 시의 마지막 그 구절 말이다.

그러나 훗날 후회한들 어떨 것이며, 잘못된 길이었다고 판명난들 또 어쩔 것인가. 가지 않을 수 없다면 가보는 수 밖에 달리 도리가 없지 않은가. 필멸할 수 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한계 앞에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만족하는 외에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신새벽 잠에서 깨어났을 때 불현듯 가슴속에 차오른 자각은 삶의 가장 어두운 밤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나를 인도해주었다.

나에게는 가지고 싶은 물건이 3가지 있었다. 돈을 많이 벌면 꼭 가지고 싶은 물건들. 브리테니커 백과사전, 소리로 벽에 금이 가기 때문에 특수한 시설을 갖춘 곳에만 있어야 한다는 희귀한 오디오, 영화속 리처드 기어가 타고 다니던, 그 무엇이더라 할리데이비슨인가 하는 손잡이가 어깨보다 높이 달린 오토바이가 그 3가지이다. 그것은 실제 물질로서의 물건일 수도 있고, 그 물건이 표상하는 무언가일 수도 있다. 즉, 백과사전은 지성, 오디오는 감성, 오토바이는 야성, 이런 식으로. 나는 감히 지성, 감성, 야성을 모두 갖춘 사람이 되고 싶었고, 내 삶의 지향점으로 삼고자 했다. 내가 어떤 직업에 종사하던, 그 속에서 어떤 실패와 좌절이 있더라도 그 지향점은 놓치지 않기로 다짐했다. 지금에 이르러 살펴보면 3가지중 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고, 이루려는 의욕 또한 실종된지 오래되었지만 그 다짐은 그로부터 상당 기간 나에게 꿋꿋한 힘이 되어 주었다.

아버지도 예전처럼 종손의 의무에 대해 구구절절이 읊지 않았고, 배움에 대한 노골적인 거부도 많이 줄어들었다. 고향을 떠나는 것이 반드시 고향을 등지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오히려 마을 밖에서의 성공이 고향이나 종중에게 득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채셨는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새마을운동이다 뭐다 해서 마을도 많이 변했고, 텔레비전, 냉장고, 전화 등 문명의 이기들이 하나둘 들어왔는데 그것은 도회로 떠난 마을 청년들이 축적한 자본이 유입된 결과였던 것이다.

또 “이선생 아들은 서울에서 큰 운수회사를 차려 많은 돈을 벌어 마을회관을 새로 짓는데 거금을 내놓았을 뿐만 아니라 집안 제실도 짓고, 조상들 비석도 그럴 듯하게 세웠다더라”, “죽산 어른 동생은 미국 어느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따서 청와대에 들어갔는데 개인적인 사소한 문제들까지 일사천리로 해결해준다더라”라는 등의 몇몇 뚜렸한 성공담들은 해미어른 아들네미나 교장어른 아들의 예와는 정반대 의미에서의 신선한 충격이었을 것이고, 아들을 떠나보내도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으리라는 안도를 주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나에게만은 “공부를 계속 하고 싶으면 농잠 전문학교에 가거나 사범학교에 가거라, 그래서 읍내 잠종회사에 취직하거나 면서기라도 하면 좋지 않겠나, 또 마을 학교 선생으로 부임해오면 평생 고향을 지킬 수 있지 않겠나”라고 했다. 물론 강력한 주장까지는 아니었지만 나만은 고향에 머물러 있기를 넌지시 원하셨던 것 같다. 아버지가 그럴 때면 어머니는 “니 하고 싶은대로 해라 마, 농잠학교 나와가 뭐할래, 평생 누에나 키우고 살래, 그기 전문학교까지 나와야 되는 일이가, 코흘리개들 훈장질은 또 뭐고, 니가 그리 하고 싶다면 할 수 없다만 그기 아이라면(아니라면) 하지 마라”라고 아버지를 핀잔하였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못하고 슬쓸히 먼산만 바라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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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awm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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