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숙희와 순이, 그리고 그 밖의 것들


숙희는 우체국장집 막내딸이다. 마을에서 같은 학년 아이들중 공부를 제일 잘 했다. 다른 아이가 1등을 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고, 그녀가 중학교 2학년 무렵 전학을 갈 때까지 실제 그런 일은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학기가 끝나고 방학중에 마을별로 이장댁에 그 마을 아이들의 성적표를 보내왔다. 마을 이장이 동네 사람들을 불러 모아놓고 아이들을 한명씩 불러 성적을 공개하며 성적표를 나누어주었다.

“신숙희, 이번에도 또 일등이가, 다른 아들(아이들)한테도 기회를 좀 주라 마, 만날 혼자만 1등하면 어야노, 다른 아들(아이들)이 다 기죽는다 아이가”

“박창수, 나온나, 니는 이번에도 꼴찌가, 창수 아배(아버지) 아(아이) 일 좀 그만시키이소, 아한테 공부할 시간을 주야지, 만날 그리 일만 시키면 우야노”

모인 사람들 모두 박장대소하였고, 창수도 창수 아배도 낯이 뜨거워질만도 하건만 넉살좋게 성적표를 받아들고 웃는다.

마을 단위로 이루어지는 공동체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문화였다. 아이들은 한 집안의 자식일 뿐만 아니라 마을의 자식이었던 것이다. 그 때 어른들은 잘하는 아이들은 그간의 노력을 칭찬해주고 부족한 아이들에게는 격려하고 용기를 주려고 그런 자리를 마련했던 것 같다. 대부분의 아이들에게는 그 날이 오기를 제일 싫어했고, 순서를 기다리는 내내 공포의 시간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한바탕 웃음 속에 행사가 치러지고 나면 아이들은 다 잊고 또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집안 농사일에, 또래 끼리의 놀이에 빠져들었고, 어느 누구도 성적을 가지고 탓하거나 비웃지 않았다. 때문에 1등한 아이도 우쭐대지 않았고, 꼴찌한 아이도 기죽지 않을 수 있었다.

 

시골에서 학교 선생이나 공무원 자식들이 입성도 깨끗하고 공부도 잘 했지만 특히 숙희는 참 어여쁘고 똑똑한 아이였다. 치렁치렁한 머리를 늘 단정하게 빗어 동여맨 것을 보면 그녀 어머니의 딸에 대한 정성이 어떠한지 짐작하게 했다. 그 아래 갸름하면서도 통통한 하얀 얼굴, 동그스름하게 솟은 이마, 얼굴 전부를 차지하고 있는 것만 같은 큰 눈망울, 예리하게 내려간 콧날, 늘 웃음기가 서려있는 선한 입술이 조화를 이루어 귀한 티를 내뿜었다. 꾀죄죄하기 그지 없는 까까머리 시골 소년들 사이에서 숙희는 한 마리 백로였다. 여름이면 뒷산 소나무 숲을 뒤덮을 정도로 무리지어 둥지를 틀고 마을 이곳저곳을 날아다니던 백로들 중에서도 최고 우두머리 백로를 연상하게 하였다.

 

특히나 큰 눈망울을 굴리며 상대방을 응시할 때는 감히 아무도 마주 쳐다볼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그 눈속으로 들어오는 모든 것들의 껍질을 뚫고 내밀하게 감추어진 곳까지 보고 있는 듯한 해맑은 눈빛이었다. ‘호수같은 눈’이라고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거기에 덧붙여 ‘맑디맑은 호수같은 눈’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디케의 여신은 눈을 가린채 선악을 판단하였다고 하나 숙희는 가장 크게 눈을 뜨고도 옳고 그름을 구별해내는 것만 같았다. 그 눈망울 앞에서는 누구도 거짓말을 할 수 없었고, 진실을 숨길 수 없었으며, 마음속 비밀이 탄로날까봐 스스로를 가책해야 했다.

 

나 또한 그러하였으니 무심코 숙희와 눈이 마주치면 간밤에 우체국장네 수박밭에서 서리해 먹은 수박씨가 내 얼굴에 박혀있는 것은 아닌지 소스라쳐 놀랐고, 여름밤 묵시적으로 금남의 구역으로 지정된 마을 위쪽 계곡에서 동네 처녀들의 벗은 몸을 훔쳐보며 킬킬대던 것을 알고 질책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무심한 듯한 그녀의 검고 커다란 눈은 늘 상대방을 압도하였고,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혼자 길을 걷다가 멀리서 숙희가 보일라치면 수줍음 많은 나는 근처 감나무 뒤에 숨어 있다가 숙희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고는 했다. 숙희는 피하지 않았지만 바보같이 내가 스스로 그녀를 피해다녔던 것이다. 한 학년에 한반밖에 없고, 그 숫자라야 40여명 남짓 한데도 거의 기억할만한 대화나 함께 한 놀이도 없었으니 어린 나이이지만 내가 얼마나 긴장하며 살았던가 놀라울 따름이다.


딱 한번 기억이 난다. 초등하교 6학년 쯤 여름방학 때였을 것이다. 학교 도서관에서 ‘십오소년 표류기’란 책을 빌려 쇠풀을 뜯다가 냇가 나무 아래서 읽고 있을 때 인기척에 돌아보니 숙희가 서 있는 것이었다. 본능적으로 숨을 곳을 찾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독안에 든 쥐였다. 고양이의 눈치만 살피는.

"사람이 오는 줄도 모르고 무슨 책을 그리 열심히 보니" 숙희의 질문이 먼저 덫을 놓았다.

나는 올무에 걸린 토끼처럼 "응..., 아무 것도 아니야, 그냥 심심해서"라고 얼버무렸다.

갑자기 열기가 머리로 쏠린 나머지 금방이라도 정수리에 구멍이 날 것만 같았다. ‘아직도 그런 유치한 책을 보느냐’고 추궁할 것만 같아 보던 책을 뒤로 감추면서 더 이상 할말이 생각나지 않아 머뭇거려야만 했다. 당시 나는 한참 톰소오여의 모험, 허클베리핀의 모험, 해저 2만리, 로빈슨 크루소 등의 모험담이나 아문젠 북극탐험기, 린드버그 대서양 횡단기, 리빙스턴 아프리카 탐험기, 컴럼버스 신대륙 발견기, 슐리이만 트로이 발굴기 등 탐험가들의 이야기에 심취해 있을 때였다.

"아 십오소년 표류기구나, 우리 집에 있는 책인데, 나는 아직 보지 못했어, 남자들 책 같아서, 재미있니, 너 책 많이 좋아하지, 우리 집에 책 많이 있어, 오빠, 언니들이 보던거랑 또 아버지가 읍내나가실 때 가끔 사오시는 책들이랑 많이 있어, 나중에 놀러와, 내가 빌려줄께"

숙희는 내가 불편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나의 대답을 일일이 듣지 않고 질문과 답변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알았어" 나는 건성으로 대답했고, 안도와 아쉬움이 교차하면서 고갯길 너머로 숙희가 사라질 때까지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날 밤 내내 숙희의 말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쑥스러운 이야기지만 그날 치마가 나풀거리는 그녀의 뒷모습은 커서의 숙희의 모습보다도 더, 훗날 군대에서 몰래 수음을 할 때마다 떠오르는 단골 장면이 되었다.

그 후로도 아버지 심부름으로 국장 어른 집을 들락거렸지만 언제나처럼 나는 볼일만 보고 재빠르게 대문을 빠져나오고는 했다. 마음 한편으로는 숙희가 방문을 열고 반겨주었으면 하면서도 ‘숙희 있나?’라고 소리한번 쳐보지 못하였으니 내 유년의 기억 한켠은 늘 시린 아픔이 자리하고 있다.

 

대밭골에서 아이들이 돈을 벌수 있는 일이 몇가지 있었는데 그중 신문배달은 아무나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도회에서는 가난한 집 아이들이 돈벌이에 내몰려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었지만 우리들에게는 특별히 선택받아야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당시 지방에는 하루쯤 지난 신문이 배달되었는데 신문 지국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신문사의 신문들이 우편으로 보내져 오면 그 다음날 아침 우체국에서 모아 배달하는 일이었다. 신문을 구독하는 집도 많지 않아 50여 가구만 돌면 되었지만 면소재지 전체를 구석구석 다녀야 하기 때문에 자전거를 타고도 한시간 이상 걸리는 일이었다. 한달에 5천원 정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당시 시골에선 꽤나 큰 벌이였다. 언제나 지원자들이 몰렸고 선발기준은 어떠한지 모르겠으나 우체국에서 가장 높은 국장 어른이 1-2년에 한번씩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학생중에서 지정해주었다.

 

어느날 하교 길에 국장어른을 만났다. "국장 어른, 안녕하십니껴?" 내가 먼저 인사하자 국장어른은 언제나처럼 “어르신들 잘 계시나?”하고 물었다.

“네” 나는 짤막하게 대답하고 가던 길을 가려는데 “아 참 니 신문배달 안해볼래?, 그 동안 상국이가 했는데 그만 두게 됐다“라고 묻는 것이 아닌가.

”제가예?“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하면서도 이 기회를 놓치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예, 국장어른, 시키만 주시면 열심히 하겠심더“라고 냉큼 대답했다. 국장 어른이 마음이 바뀌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리하여 나는 새벽마다 아침 새참을 나르거나 누에에게 먹일 뽕잎을 따오는 대신 신문배달일을 했고, 덤으로 여러 종류의 신문을 매일 볼 수 있었다. 한자가 많아 반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밖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신기하기만 했고, 새벽신문배달은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나중에 숙희가 자신의 아버지한테 나를 추천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왠지 부끄러웠지만 한편으론 숙희도 내 존재를 까먹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을 다 얻은 것마냥 행복해 하기도 했다.

 

숙희는 남녀공학인 같은 중학교에 들어갔지만 2학년때 대구로 공부하러 떠났다. 국장어른은 딸자식이지만 경쟁자도 없고, 선생들도 시원찮은 촌구석에 그냥 내버려두기엔 아깝다고 생각하였고, 늦기전에 큰 물에 가서 치열하게 살도록 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한 듯하다. 숙희로 인해 오랜 사슬에서 풀려난 것처럼 후련했지만 가끔씩은 학교와 마을에 숙희가 없다고 생각하면 삶의 의욕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그 후 세월이 흐르면서 그런 감정들은 조금씩 옅어져 갔지만 그 때 숙희의 부재로 인해 찾아들었던 서늘함만은 잊을 수가 없다.


숙희와 함께 잊을 수 없는 또 한명의 아이는 옆집에 살던 순이다. 순이는 나보다 한 살 아래였는데 선천적으로 혀가 짧아서 말을 잘 하지 못했다. 가족들은 대충 그녀의 말을 알아들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냥 웅얼거리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마치 입에 재갈을 물렸을 때 억지로 힘겹게 내는 소리처럼 본인도 힘들었겠지만 듣는 사람 또한 온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노력이 필요하였다. 순이는 그런 결함 탓인지 초등학교 3학년을 마치고 학교를 그만두었고, 어머니를 도와 동생들을 돌보거나 밭일을 거들며 지냈다. 동네 아이들은 ‘버버리(벙어리) 순이’라고 놀려댔지만 정작 순이는 별로 부끄러워하거나 위축되지 않았고, 혀짧은 소리를 지르며 달려가 놀리는 아이를 두들겨 패주고는 했다.

 

그런데 순이는 나를 무척이나 따랐다. 적어도 나는 겉으로는 순이의 결함에 대해 한번도 놀리지 않아서였을까. 내가 순이를 동정한 것도 아니고 적극적으로 그녀 편에 서서 놀리는 아이들을 혼내준 적도 없다. 오히려 나는 이기적이게도 다른 아이들이 내가 순이와 친한 것을 보면 나까지 놀림을 당할까봐 순이가 내게 가까이 오는 것조차 싫어했을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남들이 나와 순이가 함께 있는 것을 보면 어쩌나 두려워했던 것 같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순이는 이 또한 개의치 않아했다. 일부러 싫은 내색을 보여도 아랑곳없이 나만 보면 강아지마냥 졸졸 쫒아다니고는 했다.

 

학교를 그만두고서도 교과서를 들고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나를 이해시키려고 땀을 뻘뻘 흘리며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하고, 내가 들에 일손을 도우러 나갈 때에는 자전거를 타고 가는 나를 붙잡고 뒤에 태워달라고 보채기도 하였다. 남자 아이들끼리 벌거벗고 멱을 감기도 하고, 기발한 장난을 모의하기도 했던 우리들의 비밀장소인 산너머 저수지까지 따라와 나를 난처하게 하기도 하였다.

식사 때가 되어 순이가 우리 집 마당에서 얼쩡거리다가 어머니가 “순이 이리 온나, 밥먹고 가거라”라고 하면 한번 거절하는 법도 없이 밥상 머리에 냉큼 앉아 게걸스럽게 식사를 하고는 했다.

가끔씩 내 눈치를 보면서도 당돌하기만한 순이를 마냥 미워할 수만도 없었으니 그것은 안하무인격의 행동 뒤에 감추어진 외로움, 쓸쓸함 같은 것이 나에게도 전달되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이리저리 못마땅했지만 나는 불편해하면서도 마지 못해 순이의 요구를 들어주고는 했다. 책을 들고와 물어오면 ‘또 왔나, 다른 아들(아이들)한테 가서 물어봐라, 니 오빠도 있고 언니도 안있나“라고 하기도 하고, 그래도 아랑곳없이 내곁을 떠나지 않으면서 계속 웅얼거리면 ”뭔 소리고“라고 신경질을 부리면서도 종내에는 손짓발짓을 하면서 순이의 질문을 이해하려고 하였고, 나도 모르게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자전거를 태워달라고 하면 ”마을 회관 앞까지만이데이“’라고 단서를 달면서도 마을 회관을 지나 저 멀리 순이네 밭 근처까지 태워주었다. 산너머 저수지까지 따라올 때에는 그 직전 고조할아버지 묘지옆 추자나무(호두나무) 숲에서 “여기서부터는 니가 못가는데다, 가시나는 오면 안되는 데다, 그라이(그러니) 여기서 좀 기다려라, 늦으면 일찍 집에 가고, 알았나”라고 하면서 간신히 순이를 떼어놓았다. 그럴 때면 순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내 말을 들었다. 나는 일단 난처함을 모면한 것에 안도해하면서 순이와 약속한 것도 잊고 몇시간이나 흘러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그 자리에 다시 와보면 순이는 추자나무 아래에 쪼그리고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화가 치밀고, 뒤통수에 다른 아이들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니, 여(여기)서 뭐하노, 가시나가 위험하게 여까지 왔나, 니 어므이(어머니)가 얼마나 찾겠노, 빨리 가자”라고 선수를 치면서 순이의 손을 잡아 끌고 앞장서 가고는 했다. 순이는 눈물이 그렁그렁하면서도 뒤는 돌아보지 않은채 내 손을 내려놓고 날랜 토끼마냥 저 앞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나도 순이의 입모양이나 표정, 몸짓만으로도 무슨 말을 하는지 대충 알아듣게 되었다. 그런데 순이는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 이전처럼 나를 따라다니지 않았고, 우리 집에도 잘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이 되기도 하면서도 나름대로의 일상에 묻혀 순이의 변화를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눈치채지도 못하였다. 또래의 아이들이 까맣고 하얀 교복을 입고 학교에 오가는 모습들을 숨어 보면서 남몰래 설움을 삼켜야했다는 것을. 자신의 장애가 나를 포함하여 다른 사람에게 짐이 될 수도 있다는 슬픈 자각을. 그래서 달팽이 뚜껑 덮듯이 껍데기 속에서 영영 나오지 않기로 결심했다는 것을. 결국 나의 무심함은 순이에 대한 배신이었다는 것을.

 

숙희와 순이 그 밖에도 내 유년의 뜨락을 가득채웠던 풍성한 추억들이여. 신과 인간이 함께 만들어낸 멋진 풍경들이여. 함께 울고, 웃던 모든 친구들이여. 여기서 언급하지 않았다고 하여 너무 서운해하지 마라. 다음에 또 그대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있으리니.

 

나는 중학교를 마치고 사방 100리 이내 마을에서 내노라하는 수재들만 모인다는 K시에 있는 고등학교에 시험을 쳐서 겨우 입학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마을 친구들은 면소재지 농고에 진학하거나 학업을 포기하고 집안 농사일을 돕거나 일찌감치 엘도라도의 황금밭을 찾아 대도시로 떠났다. 순이도 친척이 운영하는 서울의 어느 봉제공장에 돈을 벌러 떠났다고 했다. 한마디 작별 인사도 없이. 그렇게 우리는 인생이라는 큰 바다에 내동댕이쳐졌고, 각자의 인생을 헤엄쳐 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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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awm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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