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와 상의한번 하지 않고 은밀하게 계획을 세웠으니 그것은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한다는 것이었다. 특별히 무관을 동경하거나 당시 집권자들이 군인 출신이어서는 아니었다. 진짜 평생을 군인으로 산다거나 거기서 출세하고 싶은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육사를 택한 이유는 두가지였다. 하나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로 나라에서 먹을 것, 입을 것 다 대주어 학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후미진 산골에서 대학 학비까지 손벌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참으로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번째 이유는 중학교 2학년 때 쯤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가을 걷이가 끝나고 논밭은 아이들의 겨울 놀이터로 변해 있었다. 어느날 아이들과 연을 날리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굉음이 들리고, 폭풍이 일듯 지상의 먼지와 낟가리들을 날려버리는 세찬 바람이 불더니 헬리콥터가 한 대 논바닥에 내려 앉았다.

아이들이 “와아”하고 탄성을 지르며 벌떼처럼 모여들었고, 나도 얼떨결에 헬리콥터가 내린 곳으로 달려갔다. 처음 가까이에서 본 헬리콥터 문이 열렸고, 모자에 별이 2개 달린 군인이 헬기에서 내려섰다. 별 2개는 졸개들의 호위를 받으며 산길을 따라 걸어 올라갔고, 아이들은 군인들의 제지로 더 이상 따라가지 못했다. 호기심도 잠깐. 아이들은 다시 자신들의 놀이 속으로 빠져들었고, 얼마후 군인 일행들이 돌아와 헬리콥터가 다시 날아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는 것으로 그날의 행사는 마무리되었다. 군부대에서 무슨 특별한 작전이 있었거나 6.25 때 봉황산은 낙동강 전선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국군과 남쪽으로 진격하려는 인민군 사이에 치열한 격전지였다고 하고 그 때까지도 산속 이곳저곳에는 녹슨 포탄이나 구멍 뚫린 철모가 발견되고는 했으니 그런 옛 전적에 대한 조사를 나온 것으로만 알았다.

그날 밤 사랑방에서 일찌감치 잠이 들었다가 사람들 말소리에 언뜻 잠에서 깨어났다. 마을 어른들이 모여 사랑방 윗목에서 술추렴을 하고 있었고, 나는 왠지 일어나면 안될 것 같은 생각에 자는 척하면서 어른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오늘 장학모가 왔다갔다 카데" 이장 어른의 목소리였다.
"학모가 누굽니까" 면서기인 김씨 아저씨의 목소리였다.
"니 학모라고 모르나, 아! 니는 어려서 잘 모를 수도 있겠구나, 일정 때 장점돌이라는 어른이 있었지, 그 아들이 학모고"
"저도 장점돌 어른 이름은 들어서 알고는 있지만 그 아들이 장학모닙껴, 그런데 그 동안 뭐하다가 이제야 나타났답니껴, 장점돌 어른은 어찌 되었고요"
"장점돌 어른이 일본에서 대학교도 다니고 그 때 이 마을에서는 아주 유명했지, 장점돌 어른도 일찍이 천애고아가 되었는데 천주교 신부가 데려다 키웠어, 장터 가면 왜 천주교회 안있나, 거기에 스페인인가 어디 외국인 신부가 들어와 있었지, 장점돌 어른 부모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한해 걸러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신부에게 장점돌 어른을 부탁하였다더군, 장점돌 어른이 어릴 때부터 영특했던 모양이야, 신부는 그 재주가 아까워서 서울로 유학을 보내주었고, 장점돌 어른은 맨손으로 일본유학까지 마치고 서울에서 신문사 기자 노릇을 하다가 농촌계몽 운동을 하러 다시 이곳으로 온 거였어, 장점돌 어른은 영민하고 진실해서 마을사람들이 많이 따랐지“
“맞아 나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 때 동네 얼라들(아이들) 모아놓고 한글도 가르쳐주고, 단군 할배 이야기도 해주고는 했지, 그런데 장점돌 어른한테 아들이 있었나?”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이장 어른이 다시 말을 이었다. “장점돌 어른에게는 젊은 색씨가 있었는데 얼굴이 반반한게 인물값이나 하게 생겼었지, 장점돌 어른이 서울에서 데려온 여자였어, 아무도 그 출신은 몰라, 이름이 최재임이었던가 하는 거 외에는, 장점돌 어른도 색씨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었고, 양가집 규수였는데 부모 몰래 장점돌 어른을 따라 도망나왔다는 소문이 있긴 했지만 사실인지는 모르고, 그 사이에 낳은 아들이 장학모인기라” 탁주를 들이키는 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탁주잔을 놓는 소리가 들린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라믄 그 후로 장학모 일가는 어찌되었습니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재촉하는 성질 급한 김씨 아저씨의 모습이 떠오른다.
“장점돌 어른은 어느날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만주 용정으로 떠났다고 하지 아마, 마르크스, 레닌 이론에 심취하다가 빨간 물이 들었던 모양이야, 그 때 장학모 어른은 아직 젖먹이였고, 자리 잡은 다음 데리러 온다는 약속을 하고 갔는데 몇 년이 지나도 소식조차 없었어, 장점돌 어른이 떠난지 한 2년쯤 되었나, 그 색시가 면사무소 마에다 순사하고 눈이 맞아 마에다 순사가 전근갈 때 함께 도망을 갔던 거야, 마에다 순사가 장점돌 어른이 어디 있는지 알아낸다는 핑계로 접근해서 색시를 겁박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색기가 잘잘 흐르는 자태로 보아서 꼭 그렇지만은 않았을 거야, 아무튼 장학모는 이집 저집을 떠돌면서 동냥밥을 얻어먹는 신세가 되었고, 조금 자라서는 저 아랫마을 장씨네 안있나, 그 집에서 머슴살이 비슷하게 살았지, 그러다가 6.25가 터지기 얼마전 열댓살 때쯤 되었을 때 흔적도 없이 마을에서 사라졌어, 마을에서는 키워준 은헤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놈이라고 욕을 해댔지, 나락 판 돈을 받으러 보내놨더니 그 길로 돈만 받아챙겨서는 도망을 갔던 거야, 그 후 아무도 장점돌 어른이나 장학모에 대해서는 전혀 소식을 몰랐고, 마을에서도 점점 잊혀져갔어“
“장점돌 색씨는 그 후 다시 우리 마을에 들어오지 않았니껴?” 아버지의 느릿한 목소리였다.
“장점돌 색씨가 우리 마을에 다시 들어온 것은 6.25가 끝나고 몇 년 지나서였어, 마에다 순사는 일본이 패망하자 장점돌 색씨는 버려두고 본국으로 도망갔지, 오갈 데가 없어진 장점돌 색씨는 부산 국제시장에서 미제 물건을 팔아 돈을 좀 모았나봐, 살만해지니까 아들 생각이 났는지 이곳에 들렀다가 그냥 눌러앉게 된 거야, 마에다 순사하고 사이에 낳은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도 지 애미를 닮았는지 열예닐곱 살 땐가, 이발소 보조로 있던 머슴아하고 배가 맞아 야반도주했어, 문경인가 어디 탄광촌으로 갔다지 아마”
“장점돌 색씨는 어예 됐습니껴?” 김씨 아저씨의 목소리다.
“장점돌 색씨는 장터에서 주막을 하면서 지가 버린 아들이 돌아올 것을 기다렸어, 죽기 전에 꼭 용서를 빌어야 한다면서, 그런데 본래 화냥기는 어쩔 수 없었는지 이놈저놈하고 붙어 먹었지. 동네 남정네치고 안건드려본 놈이 없었을 거야. 그러다 우리가 어렸을 때 덕재 아제라고 부르던 바보가 있었어, 정신이 온전치 못해 전빵(가게)에서 잔심부름이나 하면서 살았지, 그것도 남자라고 장점돌 색시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모양이야, 어느날 낮에 주막에 들렀다가 장점돌 색시하고 남자 방물장수가 홀딱 벗고 뒹구는 걸 보았다더군, 장점돌 색시가 덕재 아재한테 은밀한 장면을 들키고서도 ‘이자슥이 뭘 보노, 빨리 가라, 이 바보 새끼야’라고 욕을 했다지 아마, 덕재 아재가 눈깔이 뒤집혀 버린거지, 그 길로 낫을 들고 와서는 두 사람을 무참히 난자해버렸어, 마을의 비극이고 수치지, 그 후론 그 일을 입에 담지 않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었던 거고”
“그 때 시신을 염해줄 사람이 없어서 마을 어른들이 회의를 했지요, 덕재 아재를 옹호하는 측은 나라에서 절차에 따라 화장을 하던지 말던지 신경쓰지 말자고 하였고, 다른 쪽은 그래도 이 마을과 인연을 맺었던 사람인데 장점돌 어른을 생각해서라도 마지막 가는 길이나마 돌보아주자고 하였지요, 결국 마을 큰 어른이신 길수 할배의 결정에 따라 시신을 뒷산에 묻어주었지요, 그런데 장학모가 왜 나타났을까예? 별을 두 개나 달고”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장학모는 어찌어찌 하다가 군대에 발을 들여놓았고, 5.16 때 혁명군에 가담하여 그 때부터 출세가도를 달렸던 거야, 얼마전에 광주사태 안있었나? 그 때도 신군부쪽에 붙어서 승승장구한다더군, 그래서 이번에 조상들이랑 지 애미 산소를 둘러보러 온 것이라데, 앞으로 이곳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할 것이라는 말도 있고" 이장 어른이 말했다.
김씨 아저씨가 “지 애미 한테는 원한이 많았을 텐데 어찌 왔을꼬”라고 혼잣말을 한다.
“사람이고 짐승이고 때가 되면 고향을 찾는다고 안하더나, 지 뿌리를 잊을 수 없는게지, 학모는 웬만큼 출세도 했고 앞으로 더 출세하려면 지 근본을 좋은 쪽으로 만들어 놓을 필요도 안있었겠나”

그 기억 때문이었으리라. 헬리콥터의 웅장한 날개짓, 번쩍이는 별, 따르는 졸개들. 막연한 동경은 그렇게 시작되었으리라.

 고등학교 시절 전반부는 어른이 되기 위한 연습이 감행된 시기였다. 아니 빨리 어른이 되고픈 유치한 모방이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나는 자전거로도 왕복 2시간이나 걸려 등하교를 했지만 좀 사는 집 애들은 학교 앞에서 자취를 많이 했다. 친구들의 자취방은 해방구였다. 그곳에서 취하도록 술을 마셔보았고, 그곳에서 쓰디쓴 담배의 맛을 익혔다.

 무리지어 역전 뒤편 빨간 불이 켜진 유리방안에 반라의 여자들이 앉아 있는 거리를 어슬렁거렸다. 상상속의 여자를 정해놓고 연애편지를 써서는(숙희였는지도 모르겠다, 실제 숙희에게 몇 번인가 편지를 썼다가 찢어버린 적도 있다.) K여고 학생들중 괜찮은 여자애에게 건네기도 했다. 정말 마음에 들고 사귀고 싶어서가 아니라 여자애들의 반응이 어떨지 궁금하였던 것이다. 그네들도 우리와 비슷한 갈증을 겪고 있었던지 답장을 보내오기도 했다. 그러면 ‘몇월 몇일 보름달이 중천에 뜰 때 K여고 운동장에서 가장 큰 은행나무 밑으로 나와’라는 식의 유혹하는 쪽지를 전달했고, 약속한 날 담을 넘어 그곳에 가보면 정말 여학생이 나와 있었던 적도 있다. 몇 번 더 만난 다음엔 독학으로 배운 기타의 선율로 넋을 잃게 만들고는 여학생의 입술을 훔치기도 하였다. 희생양이 5명쯤 되었을 때 여학생들 사이에서 요주의 인물로 회자되어 있음을 감지하고부터 짜릿한 사냥은 종지부를 찍었다. 학교간 패싸움에 가담했다가 팔이 부러지기도 했다. 그렇게 발정난 들개처럼 통과의례를 거쳤고, 선택의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그와 함께 그동안의 수많은 일탈은 모두 접고 나는 착실한 학생으로 돌아와 있었다.

 가까스로 3학년 여름방학 때 있었던 육사시험에 합격했고, 체력검사도 통과하였으나 최종 통지는 불합격이었다. 외가쪽에 월북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당시만해도 대한민국의 깨끗한 피를 이어받은 사람들만이 국가체제에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사상적 순혈주의라고나 할까. 한방울이라도 더러운 피가 섞여 있으면 절대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머니조차 잘 모르는 친척의 철없는 행동이 먼훗날 그분도 몰랐을 자손에게까지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우다니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어머니도 “그기 다는 아인기라, 사나(사나이)가 그만 일로 기가 죽어서야 되겠나”라는 한마디 말만을 흘리고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어떠한 순혈주의도 싫어한다. 종족의 순혈주의가 외국인과의 혼인이나 입양을 꺼리도록 하고, 종교적 순혈주의 때문에 다른 종파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며, 지역적 순혈주의로 인해 지역감정의 골이 깊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뿐인가. 소규모 집단에서부터 각각의 직업군에 이르기까지 그와 같은 순혈주의는 계속해서 반목과 불신을 낳고 있다. 일례로 법조계에서도 사법시험에 합격한 사람들만이 법을 다루어야 한다는 순혈주의가 로스쿨의 출현을 극구 반대하였고, 경찰의 일정한 영역확장을 결사 저지하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이념과 사상에서의 순혈주의는 또 얼마나 심각한가. 그 외에도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힘들 정도이다. 히틀러나 일본 제죽주의의 망령이 아직도 곳곳에 살아 숨쉬고 있는 듯하다.

 구렁텅이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무위의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넘바우(마을 이름)에 살던 친구 영곤이 서울에 있는 D대학으로 원서를 내러가는데 함께 가자고 하였다. 자신이 노자돈은 충분히 마련하였으니 바람이나 쐬고 오자고 하였다.

 떠꺼머리 소년 둘은 난생 처음 와보는 대학 캠퍼스의 풍경에 신기해하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D대학 캠퍼스를 돌아보던중 화장실이 급한 나머지 법대 건물에 들르게 되었다. 화장실 옆 1층 강의실에서 진학상담을 하고 있기에 기웃거렸더니 누군가 “학생, 상담할 거면 이쪽으로 와”라고 하였다. 무심코 목소리의 주인공 앞 책상 앞에 앉았다. 상담자들은 그 전해에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사법연수원에 입소할 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저간의 사정을 말하자 상담자는 “법대가 육사보다 훨씬 나아, 군발이 시대가 영원할 것 같애, 조만간 몰락할 거야, 그러면 법이 지배하는 시대가 오는거고, 나중에 판검사도 될 수 있고, 열심히 하면 장학금도 받을 수 있을거야, 아르바이트를 해도 되고, 까짓것 못할게 뭐 있겠어, 한번 도전해 봐”라고 하였다. 전설처럼 떠돌던 이야기들이 생각났다. ‘누구는 몇십년 공부했는데도 합격하지 못해 본인은 폐인이 되고, 집안도 풍비박산이 났다더라’, ‘누구는 절에 들어가 법전을 씹어 삼키며 공부한 결과 여봐란 듯이 사법시험에 합격해서 쓰러져가는 집안을 일으켜 세웠다더라“라는 등의. 그 전설들과 겹쳐지면서 내 앞에 앉은 평범한 사람들이 판검사가 될 것이라니 신기하기만 했다. 영곤으로부터 돈을 빌려 원서를 샀고, 종로통에서 막걸리에 만취하여 싸구려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묶었다. 밤새 들려오는 신음소리와 괴성에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도 무언가 새로운 길을 찾았다는 희열이 엄습해옴을 느끼면서 꼬박 뜬눈으로 날을 새운 다음날 나는 영곤에게만 말하고 D대학 법학과에 원서를 냈다.

 영곤은 의대에 합격했고, 나는 법대생이 되었다. 인생의 전환점은 그렇게나 우연히, 느닷없이 찾아올 수도 있는 것일까. 애초에 원하던 곳이 아닌 길로 흘러가려 하는데 그냥 계속 가도 되는 것일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가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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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awm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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